가짜 비타민 주사와 무너진 특수건강진단 제도

"몇 년 동안 비타민 주사라고 했대요."
비타민, 너무나 흔하고 무해한 단어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선심 쓰듯 챙겨줄 수도 있는 그런 것. 흔쾌히 소매를 걷어 올렸을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그날 맞은 주사가 비타민이 아니었다면, 어떤 숫자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사안일> 쉰 번째 사연은 노동자들에게 킬레이션 주사를 비타민 주사라고 속여 투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한 제조업체를 조명한다. 우리나라 특수건강진단 제도가 무엇을 놓쳐 왔는지 묻기 위해서다.
비타민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것
주사 안에 든 것은 킬레이션(chelation) 제제였다. 납 같은 중금속을 혈액에서 포획해 소변으로 배출시키는 약물이다. 중금속 중독 치료에 쓰이지만, 함부로 투여하면 신장 손상 같은 부작용 위험도 있다. 킬레이션은 혈중 수치를 일시적으로 낮출 수는 있지만, 뼈와 조직에 쌓인 납까지 건드리지는 못한다. 치료가 끝난 뒤 납이 다시 혈중으로 풀려나오는 리바운드 가능성도 있다. 검사지 숫자를 바꾸는 것과 몸을 낫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의혹이 제기된 곳은 울산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DN오토모티브다. 금속노조 울산지부에 따르면 이 사업장에서 집단적인 혈중 납 이상 소견이 확인됐고,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특수건강진단 1~2개월 전 노동자들에게 반복적으로 킬레이션 주사가 투여됐다는 것이다. 회사측이 이를 비타민 주사라고 불렀다는 것도 노조의 주장에 담겼다.
그런데 공개된 숫자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노조가 2022년부터 2025년까지 노동자 115명의 특수건강진단표를 분석한 결과, 혈중 납 농도 데시리터당 10마이크로그램(10㎍/㎗) 이상이 99명으로 전체의 86%였고, 데시리터당 25마이크로그램 이상도 22명이었다.
이 수치의 심각성은 일반 인구와 비교하면 더 선명해진다. 2024년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 국민환경보건 기초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혈중 납 농도 평균은 1.44마이크로그램이다. 이 사업장 노동자들의 혈중 납 농도는 국민 평균의 7배에 이른다.
미국 산업안전보건청(OSHA)에 따르면 혈중 납 농도가 10마이크로그램 수준부터 신장 기능 저하와 신경행동 이상이 나타날 수 있고, 20마이크로그램을 넘으면 인지기능 저하와 생식 기능 이상 위험이 높아진다. 미국 직업환경의학회(ACOEM)는 혈중 납 농도가 30마이크로그램 이상이거나 20마이크로그램 이상이 연속으로 확인되면 납 노출 작업에서 의학적 배제를 권고한다.
노조는 2023년 특수건강진단에서 혈중 납 농도가 30마이크로그램을 넘어 직업병 요관찰자(C1) 판정을 받은 노동자가 3명 있었다고 밝혔다. C1이면 작업 전환과 추적 관찰이 뒤따라야 한다. 특수건강진단은 특정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를 상대로 한 직업성 건강감시다. 이런 점에서 노조가 폭로한 숫자들은 개별 검진 결과의 우연한 집합이 아니다. 일터 전체가 보내는 집단적 신호에 가깝다.
검진이 예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특수건강진단의 의미는 결과표에 있지 않다. 그 결과가 노출 저감, 작업 전환, 환경 개선으로 이어지는 데 있다. 이번 사건에서 제기된 의혹의 핵심은 바로 그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는 데 있다. 납 노출로 인한 건강 이상이 확인됐는데도 작업환경을 바꾸는 대신 노동자의 몸에 약물을 투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약물이 검진 직전에 투여됐다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구조가 만들어지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검진표상 이상 소견은 사업주에게 공정 개선과 설비 교체, 그에 따른 비용과 책임을 요구한다. 반면 수치를 낮추는 일은 빠르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든다. 제도가 예방보다 회피를 더 강하게 유인할 때, 검진은 왜곡의 대상이 된다. 킬레이션 사건은 이 같은 구조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오래된 제도, 반복되는 왜곡
강한 기시감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다. 2006년 부산의 한 피혁업체에서 중국동포 노동자가 디메티포름아미드(DMF) 중독으로 급성 전격성 간부전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다. 사건 이후 노동부가 전국 특수건강진단기관 120곳을 점검한 결과, 96개 기관(80%)이 부실기관으로 적발돼 지정취소나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시정조치 대상까지 포함하면 120곳 중 119곳에서 부실이 확인됐다.
무자격자가 검진을 하고, 직업병 유소견자를 일반 질병으로 둔갑시키고, 의사를 허위 등록하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건강진단기관과 사업주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 검진이 보호장치가 아니라 그저 무의미한 요식절차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 이미 20년 전에 드러난 제도의 민낯이다.
그때는 판정과 보고가 비틀렸다면, 이번에는 판정 이전에 몸이 조정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나는 기록을 고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거쳐 기록을 고치는 방식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위험의 원인을 현장에서 제거하지 않은 채, 드러나는 결과만 통제하려 했다는 점이다. 제도가 없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제도가 현장을 바꾸지 못하는 방식으로 오래 작동해 온 결과다.
사업장이 영세할수록 제도는 더욱 거세게 흔들린다. 노동건강정책포럼이 지난 17일 개최한 '일하는 사람을 위한 건강진단제도,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 토론회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특수건강진단 수검률은 전체 노동자의 14.31%였다. 5명 미만 사업장은 수검률이 3.99%로 가장 낮지만 진단율은 2.74%로 가장 높다. 위험은 높지만 검진은 가장 적게 받는 구조다. 작업환경측정 실시율도 전체 사업체의 3.9%에 그쳤다.
제도의 실효성도 의심받은 지 오래다. 산재보상 질병의 60%는 근골격계질환인데, 특수건강진단 직업별 유소견자(D1)의 90%는 소음성 난청에 집중돼 있다. 실제 직업병 구조와 검진 체계가 포착하는 질병 구조가 따로 논다는 뜻이다. 검진은 이뤄지지만 예방은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소음성 난청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정부가 소음성 난청 산재보상에 연령보정 도입을 검토하면서 시작된 이번 논쟁은 '제도가 어떤 위험을 두텁게 보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개악'이냐 '합리화'냐는 구도를 넘어, 차분하게 따져볼 문제다. 중요한 건 예방과 보상이 함께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한쪽만 부각하면 답에서 멀어질 뿐이다.
노동자들이 몸으로 구조신호를 보내기 전에
킬레이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고용노동부 감독 덕분이 아니었다. 특수건강진단 사후관리 덕분도 아니다. 노조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제도가 비어 있는 자리를 사람이 대신 메웠다. 노조의 순기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제도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으로 최후의 구조신호를 보내기 전에 작동해야 한다.

4월28일은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우리는 해마다 이날을 기억하며 떠난 이들을 애도한다. 그런데 그 죽음들은 대개 갑자기 오지 않았다. 검사지에 찍힌 수치, 설명되지 않은 주사, 멈춰 선 사후관리, 바뀌지 않은 공정처럼 오래 방치된 신호 끝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벌어진 죽음만이 아니다. 예방될 수 있었지만 예방되지 못한 시간, 그 시간을 맨몸으로 건너온 노동자들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노동안전이 밀려난 자리에서, 추모는 그렇게 반복될 것이기에.
일환경건강센터 PL (tokki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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