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피플] ① '4조'를 만든 천원...다이소의 '천원 공식'

오진주 2026. 4. 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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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대한경제=오진주 기자]“이게 어떻게 천원이지?”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 자서전 <천원을 경영하라> 중에서.

퇴근 후 종종 다이소 매장에 들렀던 박정부 아성다이소 회장은 매장을 찾은 사람들의 이 말이 “와, 싸다”라는 감탄보다 더 듣기 좋았다고 한다.

다이소를 찾는 누구나 ‘천원일 수 있는 비법’에 대해 궁금해 한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싼 값’을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천원의 가치’를 우선 생각하는 것이다.

◆ 위기에서 건진 해답...‘균일가’ 실험

박 회장은 처음부터 ‘천원숍’을 낼 생각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첫 직장으로 구로공단에서 전구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고 16년 동안 다니며 공장장으로 승진도 했다. 하지만 노조와 회사의 갈등에 대처하지 못했단 이유로 회사에서 밀려나며 퇴사를 결심하게 됐다. 전업주부인 아내와 초등학생이 두 딸이 있는 40대 가장이었다.

회사를 나온 후 그는 일본 해외연수 사업을 하는 동생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당장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만든 회사가 지금 다이소의 모태인 ‘한일맨파워’다.

일본을 오가던 박 회장은 자연스럽게 무역에 눈을 뜨게 된다. 1980년대 경제가 호황이던 일본에 한국 상품을 팔아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에서 시작했다. 전 직장에서 유리 등을 만들어 수출했던 그는 판촉행사를 할 때 나눠주는 열쇠고리 같은 상품을 일본에 납품하며 생활용품 유통 시장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

박 회장이 납품하던 거래처 중에는 균일가숍도 있었다. 균일가숍은 소득이 낮은 국가에서 유행할 것 같지만 실제는 달랐다. 일본과 유럽 등에는 이미 균일가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소비 문화가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한국에도 비슷한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생각이 국내 최초의 균일가숍으로 이어졌다.

1997년 서울 천호동에 문을 연 ‘아스코이븐프라자(다이소 1호점)'/사진=아성다이소

국내 첫 균일갸숍을 만들기 위해 박 회장은 1992년 아성산업을 설립했다. 한일맨파워가 일본에 생활용품을 수출한다면, 아성산업은 내수 유통을 위한 회사였다.

그때 박 회장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사람을 만난다. 일본 다이소의 야노 히로타케 회장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균일가숍을 만든 야노 회장의 계기는 우연이었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상품을 팔던 그는 상품에 일일이 가격을 붙이는 게 힘들어 가격을 100엔으로 통일하게 됐다. 이게 일본의 ‘100엔숍’이다.

야노 회장과 만남을 계기로 일본 다이소에 상품을 납품하던 박 회장은 야노 회장의 신임을 쌓으며 일본 다이소에 의존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터졌다. 야노 회장이 자신들과만 거래하길 원했다. 독점 거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야노 회장과 신뢰를 끊어낼 수도 없었다. 박 회장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일본 다이소에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상품을 국내에서 팔기로 했다.

다이소 명동역점 앞을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사진=오진주 기자

1997년 서울 천호동에 다이소 1호점인 ‘아스코이븐프라자’를 열었다. 국내 첫 균일가 소매점이다. 그해 가을 외환위기(IMF)가 터지며 천원숍은 발 디딜 틈 없이 고객들로가득 찼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다이소의 발목을 잡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다이소가 일본 기업이라는 인식이다. 야노 회장이 독점 거래를 요구했을 때 박 회장은 안전장치로 한국 균일가숍에 대한 지분 투자를 요구했다. 그렇게 일본 다이소가 34%에 해당하는 자본을 출자했고, 박 회장은 ‘다 있소’를 연상시키는 ‘다이소’라는 단어가 괜찮아 다이소라는 브랜드를 쓰게 됐다.

박 회장은 이 ‘한’을 30여년 년 뒤에야 풀게 된다. 지난 2023년 말 아성다이소의 최대 주주인 아성HMP가 2대 주주인 일본 다이소산교가 보유한 지분을 전량 사들여 순수 한국 기업이 된 것이다. 박 회장은 자서전에서 이때를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다이소 명동역점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화장품을 살펴보고 있다./사진=오진주 기자

◆ "'땡처리' 아닙니다"

박 회장의 경영 인생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편견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아스코이븐프라자가 성공하자 국내에선 불황을 업고 균일가숍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천원숍’, ‘천냥숍’ 등 이름도 다양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IMF로 부도가 난 회사의 상품을 대량으로 떼다 파는 ‘땡처리’ 가게에 불과했다.

땡처리 가게가 하나둘 문을 닫을 때 다이소가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균일가’라는 본질을 계속 지켰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유통·제조사는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에 들어간 재료비와 인건비 등 비용을 다 따진 뒤 이윤을 붙여서 가격을 책정하지만 다이소는 반대다. ‘천원’이라는 가격을 설정한 뒤 이에 맞춰 상품을 기획한다.

방법은 핵심 기능만 남기고 덜어내는 것이다. 공장을 방문해 덜어낼 수 있는 공정을 찾아내고, 가장 싸게 잘 만들 수 있는 나라를 찾는다. 대나무 제품은 베트남에서 찾고, 도자기 제품은 터키에서 찾는 방식이다.

아성다이소 경기 용신시 남사허브센터에서 상품이 이동하고 있다./사진=아성다이소

과거 다이소에서 판매한 유리잔이 날개 돋친 듯 팔린 적 있다. 유리잔에 써있진 않지만 이 유리잔은 프랑스의 유명 브랜드 ‘루미낙’의 제품이었다. 박 회장은 프랑스를 찾아 가격을 낮춰 달라 요구했고, 그 방법으로 야간에 가동하지 않는 설비를 활용하고 루미낙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했다. 소비자들은 루미낙인지도 모른 채 유리잔을 구입했다.

실제 다이소 직원들은 새로 출시할 상품이랑 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건지 묻기도 했다. 사람들이 천원을 선택하면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다시 상품 개발에 들어갔다.

다이소 명동역점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계산을 하고 있다./사진=오진주 기자

박 회장은 가성비는 싸기만 한 게 아니라 가격에 비해 두 배 이상의 만족과 가치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원의 가치’에 집중했기에 다이소는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환율이 치솟자 환율 영향이 적은 국내 제조업체를 찾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가격보다 물건의 가치를 기준으로 상품을 설계해 온 다이소는 지난해 매출 4조원대의 유통 기업으로 성장했다. 매출 목표보다 ‘천원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집중한 결과다. 박 회장이 “한 번도 연매출 3조원을 해야지”라는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오진주 기자 ohp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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