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125>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당신은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가


작가는 상상력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다. 소설가 앞에 서면 사람들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생의 비망록을 꺼내 놓고 싶어 한다. 자기 삶이 얼마나 굴곡진 드라마였는지, 그 안에 얼마나 극적인 사연이 웅크리고 있는지를 작가라는 목격자에게 증언하길 원한다. 그것은 어쩌면 제삼자의 눈으로 객관화해 마침내 자기 생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일지 모른다.
1968년,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작가는 여행을 떠났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주인, 무스타파 제로를 만난다. 유럽의 최고 부호였지만 그는 자기 호텔을 찾을 때면 욕실조차 없는 작은 다락방에 머문다. 작가는 궁금하다. 왜 그는 화려하고 안락한 방을 마다하고 굳이 초라한 방을 고수하는가. 작가와 마주 앉은 제로는 자기 인생을 굽이굽이 펼쳐놓는다.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던 1932년, 전설적인 지배인 구스타브는 엄격한 관리와 정중한 서비스로 호텔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진한 향수를 뿌리고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우아한 태도로 고객과 직원을 대했다. 그의 입에선 늘 점잖은 말과 아름다운 시어가 쏟아져나왔다. 그는 거친 세상으로부터 자유의 성,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구스타브의 향수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무례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의 바깥에 존재하는 문명의 공기였다. 그가 고집하는 과할 정도의 예의와 격식도 결코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자긍심을 고취하는 문화의 품격이었다. 외로운 부호가 애써 구스타브의 서비스를 찾아 호텔에 오는 이유였다. 문명화된 위로 안에서 그들은 비로소 자신이 품위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세상이 진보하고 변화하는 것에 열광한다. 그러나 인류를 지탱해 온 힘은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가치를 끝까지 붙들려는 완고한 의지와 노력에서 나온다. 험한 세상의 풍랑 속에서 인간다움의 형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어둡고 혼란했던 시대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당시 풋내기 로비 보이였던 제로를 구스타브는 엄격하게 기초부터 훈련했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인의 기술이 아니라 신분과 출신의 벽을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구스타브는 직업적 소명에 헌신하며,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장인 정신의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제로와 관계 역시 단순한 고용 관계가 아니라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전수하는 스승과 제자, 대를 이어 생을 계승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결합에 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이 전쟁이 발발하고 단골 투숙객이던 마담 D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집사는 실종되고 유산상속을 처리하던 변호사는 살해되는 가운데 구스타브도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충직한 제로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하고, 마담 D의 아들과 그가 고용한 킬러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파헤친다.

눈 덮인 산맥과 가파른 절벽을 넘나드는 추격전에서도 구스타브는 끝까지 자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시대의 유산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여정을 이어가는 그는 총칼 앞에서도 예의를 지키고, 폭력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무례함은 두려움의 표현일 뿐’이라는 그의 일성은 광기의 시대를 꿰뚫는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선언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참히 파괴하고 혁명은 질서를 무너뜨리며 인류를 고통 속에 가두었다. 동화 속 그림 같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도 전쟁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겨울에 피는 꽃이 있듯 가장 비참하던 시절에도 희망은 피어난다. 제로는 제빵사 아가사와 사랑에 빠진다.
제로는 그녀에게 실반지 하나 끼워줄 수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시집을 선물할 만큼 마음은 풍요로웠다. 그는 아가사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했고 그녀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가끔은 그녀도 시를 지어 제로의 마음에 화답했다. 그들의 사랑은 구스타브가 가르친 인간에 대한 예의와 품격, 문화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난 가장 눈부신 꽃이었다.
시대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무례해졌다. 권력은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그 속에서도 구스타브는 끝까지 움츠러들지 않았다. 비록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가 지켜낸 격조와 가치는 제로에게 전수되고 다시 작가를 통해 기록되어 불멸을 얻었다. 육체는 유한할지라도 고결한 정신의 향기가 대를 이어 전해진다는 사실은 인생의 또 다른 희망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혁명이 아니다. 아무리 추악한 세상일지라도 단 한 사람이나마 끝까지 예의를 지키고 품격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문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거대한 이상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대하는 말투, 무너질 때조차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 그리고 끝내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결심.
제로가 작가에게 털어놓은 것은 과거에 살았던 어느 호텔 지배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야만의 폭풍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던 인간 존엄의 파편이었다. 작가는 제로의 고백을 받아적으며 다락방에 쌓인 눅눅한 고독과 그가 끝내 지키려 했던 분홍빛 호텔의 잔향을 문장으로 조각했다. 결국 소설이란 작가가 홀로 지어낸 신기루가 아니라, 누군가 생의 벼랑 끝에서 간절히 내민 기억의 손을 맞잡는 행위인 셈이다. 그렇게 작가도 제로라는 거대한 서사를 만나 비로소 슬럼프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신은 소설가 앞에 앉아 어떤 사연을 펼쳐 보이고 싶은가. 무례한 세상에 맞서 당신이 뿌리고 있는 향수는 무엇이며, 흔들리는일상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읊조리는 당신만의 시는 무엇인가. 작가는 오늘도 당신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극적인 드라마를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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