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의 여행이라는 꽃다발 <58> 전북 전주] 새벽 거리 걷기는 여행 속 또 다른 여행 떠나는 방법

최갑수 시인 2026. 4. 2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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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한옥마을 골목의 그윽한 정취. (오른쪽)풍남문. /사진 최갑수
최갑수 시인 -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여행을 자주 한다. 여행을 ‘간다’라고 하지 않고 ‘한다’라고 표현한 건 일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러’ 가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떠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여행을 와서 여행이 가고 싶을 때면, 새벽 거리를 혼자 걸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페루 쿠스코, 튀르키예 이스탄불, 포르투갈 리스본, 타이베이의 새벽 거리를 걸으며 나는 여행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새벽 거리를 걷는 것은 여행을 ‘하러’ 온 내가 잠시 여행을 ‘떠나는’ 방법이다.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아침

지금은 전주 한옥마을을 걷고 있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지난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여행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여행객은 나 혼자뿐이다. 아침 운동을 나온 노인들이 천천히 걷고 있다. 봄 아침의 한옥마을은 고요하다.

걷기는 풍남문에서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순교가 행해졌던 곳이다. 1791년 12월 8일, 당시 32세였던 윤지충은 풍남문 밖 형상에서 불효, 불충, 악덕 죄로 사형되면서 한국 천주교 사상 첫 순교자가 됐다. 참수당한 그의 머리는 5일간 풍남문 앞에 효시되었는데 이것이 신해박해다.

윤지충의 순교 이후 한국 천주교는 본격적인 박해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최초의 순교지에 그들을 기리는 전동성당이 세워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가장 이국적인 풍경쯤으로 가볍게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성당 주춧돌은 순교자의 선혈이 어린 풍남문 성벽에서 가져온 것으로 세웠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를 맡았다고 한다.

낮이면 한복을 입고 셀카를 찍는 여행객으로 북적이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성당은 고즈넉하고 경건하다. 고개를 들어 성당 꼭대기에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본다. 아름답다. 지금까지 전동성당을 수차례 찾았지만 이런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문득 여행을 와서 아름답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전동성당을 나와 경기전을 지나친다. 경기전은 아홉 시에 문을 연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한강 이남에서 유일하게 궁궐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오목대 가기 전 오른쪽 골목을 따라 한벽루 방향으로 걸으면 남천교다. 남천교에는 ‘청연루’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청연루에서는 전주천, 한벽교, 승암산(치명자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변을 따라 계속 가면 국립무형유산원이다. 꼭 한번 가보기를 권한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왼쪽부터) 전동성당. 전주향교. 삼양다방. /사진 최갑수

동네 마실 하듯 걷는 산책의 시간

국립무형유산원을 나와 한벽루를 지나 한벽문화관 방면으로 가면 전주향교가 나온다. 중국 7현과 동방 18현 등 50인의 유학 성인 위패를 모신 큰 규모의 향교다. 우리나라에서 온전히 보존된 향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애초 경기전 옆에 있었으나 한차례 외곽 이전 뒤 1603년 현 위치로 옮겼다.

전주향교를 지나면 다시 오목대다. 전주공예품전시관 맞은편으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된다. 이성계가 고려 말우왕 6년(1380년)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자기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이성계는 한나라 유방의 시를 읊으며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고 한다. 오목대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다. 뒷짐을 지고 한옥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준다. 커피가 달다.

오목대를 지나 한옥마을 산책을 이어간다. 교동아트센터와 최명희문학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교동아트센터는 갤러리와 세미나실 등을 갖춘 곳으로, 각종 예술 관련 행사와 전시회를 열고 있다. 최명희문학관은 ‘혼불’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최명희(1947~98)를 기념하는 곳. 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다양한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주전통술박물관과 전주한옥생활체험관, 마지막 황손 이석이 살고 있는 승광재도 지난다.

어느새 해가 떠서 골목을 비춘다. 햇살은 담장을 따스한 노란색으로 물들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나는 골목을 기웃거리며 셔터를 누른다. 한옥마을 찾은 지 몇 번 만에야 비로소 만나는 여유로움이다.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개를 끌고 산책하는 여성이 지나가자, 샴푸 향이 풍겨왔다. 아마도 지금 이 도시의 사람 중 적어도 3분의 1은 머리를 감거나 칫솔질하거나 비누로 얼굴을 씻고 있겠지. 도시는 부스스한 표정의 피곤한 얼굴로 깨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풍경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콩나물국밥 한 그릇과 커피 한 잔의 여유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풍남문 앞이다. 풍남문 앞은 남부시장이다. 이른 아침부터 상점들이 문을 연다. 일찌감치 장을 보러 나온 주민으로 시장은 제법 복잡하다. 남부시장에는 유명한 콩나물국밥집이 몇 곳 있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찾던 어느 집으로 들어간다. 잘게 썬 오징어가 듬뿍 올라간 콩나물국밥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 집은 수란이 담긴 그릇을 따로 내주는데, 국밥 국물을 몇 숟가락 붓고 마른 김을 잘게 찢어 비벼서 먼저 먹는 것이 이 집 콩나물국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 서류 가방을 자리 옆에 놓고 중년의 남자가 국밥을 먹고 있고 등산복을 가볍게 차려입은 아주머니 세 명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는다. 모두 현지인이다. 나는 그들 틈에 섞여 국밥을 먹는다.

국밥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러 삼양다방이라는 곳으로 왔다. 1952년 문을 열었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 창가에는 옛날식 인조가죽 소파가 놓여 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창문을 넘어 온 봄 햇빛이 커피잔을 비춘다. 나는 그 빛이 상하지 않도록, 얇고 부드러운 붓으로 오래된 조각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른다. 지금은 오전 아홉 시 반이다. 커피를 마시고 경기전에나 가봐야겠다. 누구나 한번쯤 가보았을 전주 한옥마을, 하지만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한옥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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