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부처 칸막이에 갇힌 데이터, 한국 AI 혁신의 걸림돌

이윤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6. 4. 1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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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하지만 분산돼 있어
AI가 활용할 데이터 부족
중소기업엔 장벽 더 높아
부처마다 다른 기준·절차
국가데이터처가 통합하고
연결성 높이는 게 첫걸음
2014년 2월 생활고를 겪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세모녀가 서울 송파구의 한 단독주택 지하1층에서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이라는 메모와 함께 70만원이 든 현금봉투를 남겼다. 이러한 비극은 건강보험료 체납 등 위험신호가 있었음에도 감지하지 못한 정부의 분산된 데이터 처리 시스템에도 원인이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같은 아이를 두고도 유치원은 교육부, 어린이집은 복지부 소관이었다. 관할 부처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시설 기준, 교사 자격, 지원 방식이 수십 년간 제각각이었다. 부모들은 그 혼란을 감내했고, 국가는 이를 정리하는 데 수십 년을 썼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는 그만큼 기다릴 여유가 없는 또 다른 칸막이가 있다. AI와 데이터의 세계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정부와 건강보험, 금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출생부터 일과 소득, 소비까지 방대한 데이터가 이미 시스템에 쌓여 있다. 그런데 기업들은 “정작 쓸 만한 데이터는 없다”고 말한다. 국회미래연구원 조사에서 기업의 59.5%가 데이터 부족이나 품질 미흡을, 47.9%는 과도한 규제와 법적 불확실성을 AI 도입의 핵심 장애로 꼽았다. 데이터가 없는 게 아니라, AI가 학습하고 활용할 수 있는 준비된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다.

몇 년 전 일어난 송파·수원 세 모녀 비극 뒤에는 “위기 신호는 이미 시스템 어딘가에 있었다”는 탄식이 따라다녔다. 건강보험료 체납, 단전·단수, 월세 체납 같은 징후가 각 기관에 흩어져 있었지만, 이를 한눈에 모아 위험 신호로 읽어낼 ‘연결’이 없었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45종 정보를 연계해 위기가구를 찾아내고 AI 초기 상담까지 진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이 성과를 내는 건 기술이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데이터 연계의 권한과 책임이 한 축으로 집중됐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복잡하다. 건설·제조 현장에서 헬멧 미착용이나 작업자 졸음을 실시간으로 감지해 중대재해를 막는 AI CCTV를 보자. 이런 AI는 턱끈 착용 여부나 눈꺼풀 처짐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정확도가 높아진다. 그런데 현행 개인정보보호 원칙 아래에선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얼굴과 턱선이 가려지면 AI는 턱끈 착용 여부와 졸음 상태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중소기업들은 모자이크 전처리와 법적 검토 비용조차 감당하기 벅차다. 원래도 비싼 데이터에 규제 비용까지 더해지면, 자본이 없는 기업은 AI 도입의 출발선에 서기조차 힘들다.

그 기준을 정할 권한도 흩어져 있다. 공공 데이터는 행안부, 민간 데이터 산업은 과기정통부, 개인정보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저작권은 문체부가 쥐고 있다. 여기에 AI 기본법은 시행됐고, 공공 부문 AI 활용을 담은 인공지능 및 데이터 기반 행정 법제도 바뀌고 있으며, 국가데이터처는 국가데이터기본법과 국가데이터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다.

SK의 AI 데이터센터 울산 조감 이미지 /SK텔레콤

기업은 서비스 하나를 만들 때마다 여러 창구를 돌며 허용 범위를 묻는 ‘탐색 비용’을 치러야 한다. 대기업은 로펌과 컨설턴트를 붙여 이 미로를 통과하지만, 중소기업은 그 비용과 시간 앞에서 AI 도입을 포기한다. 결국 규제의 칸막이가 기업 규모에 따른 ‘혁신의 격차’를 낳는 진입 장벽이 되고 있다.

문제는 악의가 아니라 선의의 충돌이다. 각 부처는 자기 영역에서 데이터와 AI를 키우겠다고 뛴다. 모두가 ‘활성화’를 말하지만, 다른 부처의 데이터가 자기 경계를 넘어오거나 내 데이터가 나갈 때는 즉각 방어적으로 돌아선다. 결국 각 부처가 덧붙인 안전장치 때문에 기업들은 방대한 규제 비용을 짊어지게 된다. 이것이 한국 AI 성공 가능성을 멀어지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다.

해법은 복잡하지 않다. 국가데이터처가 이름만 새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 데이터 최고 책임자(Chief Data Officer) 역할을 해야 한다. 모든 부처 권한을 통합하자는 게 아니다. 부처마다 다른 데이터 표준, 결합 절차, 반출 기준을 공통 원칙으로 정렬하라는 뜻이다. 중소기업은 상담과 사전 검토를 한 창구에서 마칠 수 있도록 원스톱 체계를 열어줘야 한다. 기준과 인센티브만 맞춰도 데이터 전처리와 규제 대응에 드는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것은 예산을 더 쓰기 전에 할 수 있는 성장 정책이다.

세 모녀 비극이 드러낸 것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데이터와 기관 간 연결의 실패였다. 지금 한국 AI 산업이 놓치고 있는 것도 데이터 총량이 아니라, 데이터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국가 조직 역량이다. 데이터는 부처 칸막이 속에 갇혀 있는데 GPU와 소버린 AI에만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다면, 그 값비싼 인프라는 잠재력을 살리지 못한 채 공회전할 것이다. 데이터가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는 나라에서 AI 경쟁력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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