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실용’이 ‘법’을 이기는 나라
실용에 취한 듯 거짓말도 수용
공천은 무죄, 컷오프면 유죄
진실에 대한 믿음도 잃어버리나

선거는 이미 오염됐다. 똑같은 혐의도 공천받으면 무죄, 컷오프면 유죄다. 정략적으로 변질된 실용주의 때문에 해괴한 면죄부가 횡행한다. “당선될 사람에게 태클을 걸지 마”처럼 들린다. 지금까진 ‘국민 주권’ ‘내란 청산’ 같은 강압적 캠페인을 밀어붙이던 정권이 이젠 ‘묻지 마 실용주의’에 올라탔다.
유무죄를 가리는 곳은 특검도 국정조사도 아니다. 법원, 즉 재판정(裁判廷)이다. 그런데 저들은 실용 깃발을 흔들며 대통령의 재판을 정지시켰다. 유무죄는 국정조사로 밝혀지는 게 아니라 재판을 해야 가려진다. 여권·야권에 똑같이 적용돼야 할 ‘법 저울’은 이미 망가졌다. 전도(顚倒)된 가치관 위에 민주주의가 멀미를 한다.
실용과 윤리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이중 잣대에 국민의 분별심도 희미해졌다. 대통령은 미·중 갈등에 대응하는 외교 전략으로 실용을 내세웠다가 이스라엘에는 갑자기 보편적 윤리라는 채찍을 휘둘렀다. 청와대 대변인은 ‘긴 관점’을 강조했다. 지금은 틀려도 훗날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연작(燕雀)이 감히 대붕(大鵬)의 뜻을 알랴” 하는 가르침 같았다.
급기야 ‘실용’은 ‘법’을 짓누르고 있다. 실용에 취한 듯 전 국민이 명백한 거짓말을 통째로 수용하는 현실인데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제 필연적으로 어떤 레벨의 거짓말도 통용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미국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책 ‘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에서 통탄하듯 우리는 진실로 향하는 통로를 끊어버렸고, 진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불법 대북 송금 수사에 ‘회유 조작이 있었느냐’를 놓고 진실 공방을 벌인다고 보도되지만, 사람들은 관심 없다. 어차피 ‘공방’은 끝이 없을 것이고, ‘진실’은 무소식일 것이며, ‘실용주의 프로퍼갠더’에 복속하는, 재판 소멸이라는 목적지만 내비게이션이 가리키고 있다.
실용주의 가면을 쓴 포퓰리즘은 정밀한 간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천박한 실용에 대중은 잘 속는다.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유복한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사이비 실용주의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일꾼들 덕이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너무 잘 믿는다. 실용의 실체도 모르면서 법치와 도덕보다는 대통령의 ‘실용’을 믿고, 핵무기에 관한 한 평양의 ‘선의’를 믿으려 든다. 그래서 주식 지표가 6000을 찍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다. 나치와 홀로코스트가 세계 어느 지역에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아마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모범적 민주 국가에도 한 달이면 본격적인 파시즘이 발현할 수 있다.
계엄이 망동이라면 내란 청산은 광기다. 그걸 깨닫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도덕적 우월성에 취하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도덕적 우월성 세력은 잔혹해진다. 그러나 그 잔혹한 도덕주의마저 사이비 실용주의의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지금의 국정 조사는 본질적으로 부관참시다. 대법 판결까지 나서 땅에 묻힌 것을 다시 꺼내 뒤집는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보복과 증오보다 강력한 선동적 에너지는 없다. 포용과 통합보다 몇 곱절 빠르게 군중에게 흡수된다. 보복과 증오를 속에 숨긴 채 외형적으로 분칠한 명분이 바로 ‘청산’이다. 적폐 청산이든 내란 청산이든 작동 원리는 같다. 이제 그 청산이 실용주의에 바통 터치를 했다.
‘사이비 실용’은 자칫 ‘실용 독재’로 흐를 수 있다. 인기 영합주의를 실용으로 착각하는 중독 증세 때문이다. 우리는 안다. 누군가 애쓴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끄떡없던 세상도 때가 되면 바뀐다. 때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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