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1등도, 영원한 1등도 없어… 늘 정직하게 이기고 싶었다

김윤덕 선임기자 2026. 4. 19.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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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 최민정
국가대표선발전을 압도적 1위로 마무리한 최민정 선수는, 빙판 위 냉정하고 침착한 표정과 달리 인터뷰 내내 밝게 웃었다. 자신보다 '강적'이라 느낀 선수가 누구였느냐고 묻자 "김연경, 김연아 선수"라고 했다. /장경식 기자

우울감, 무력감이 온몸을 덮칠 때 최민정 경기를 다시 본다. 빙판 위 칼날을 딛고 추월, 또 추월하는 그는 포기를 모르는 황소 같다. 혼돈과 격돌, 무자비한 경쟁을 뚫고 끝내 ‘바르게 이기는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집념. 그 독한 아름다움이 세상의 모든 나태함을 집어삼킨다.

밀라노에서 돌아온 최민정을 만났다. 예능·유튜브 등 한 달간 극한 일정을 소화한 그는 지쳐 보였지만 애써 웃었다. 훈련만은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진통제를 먹고 뛴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다시 압도적 1위. 스물여덟 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최민정이 프리지어꽃처럼 웃었다.

◇ 넘어질 위기, 이 악물고 버텼다

-밀라노에서 ‘올림픽 대표 은퇴’를 선언해 온 국민이 놀랐다.

“세 차례 올림픽에 출전했고, 이 정도면 제 역할은 다한 것 같아서….”

-동·하계 올림픽 통산 최다 메달리스트(7개)더라.

“충분히 의미 있는 성적이라고 생각한다. 후회는 없다.”

-최근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압도적 기량을 선보여 올림픽 은퇴를 재고해달라는 여론이 높다.

“만류하는 분들 많은데 무릎 상태, 팀과의 관계 등 고려할 게 많아 확답을 드리기 조심스럽다.”

-국가대표도 내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까지만 뛰겠다고 했던데.

“제 생각은 그런데,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봐주시면 좋겠다.”

-국가대표선발전에선 1위를 일찌감치 확정 짓고도 마지막 경기까지 사력을 다하더라. 십자인대 부상으로 진통제를 복용하면서까지.

“선수에겐 모든 대회가 소중하고,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관중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최민정 최고의 장면은 뭐였을까?

“3000m 여자 계주 우승. 네덜란드 선수가 넘어졌을 때 휩쓸려 넘어지지 않고 버텨낸 것이 뿌듯하다.”

-99%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던데.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선두와 거리가 벌어지더라도 일단 속도를 줄여 중심을 잡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최민정이라 가능했을까?

“세 번의 올림픽 등 그간의 무수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이다.”

-선수들의 결속된 팀워크가 우승 비결이라고 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해준 덕분이다. 팀원들 덕에 금메달 하나 더 땄다(웃음).”

-우승한 뒤 선수들이 울더라.

“나 빼고 다 울고 있어서 놀랐다(웃음). 그동안 고생한 기억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한국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보다 체격이 작고 힘도 약해, 밀어주는 구간에서 추월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매일 아침 개인 훈련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 팔굽혀펴기 운동을 했다. 시합 당일 오전까지도 계주 영상을 보며 전략을 짰다.”

-1500m 개인전에서는 김길리 선수가 막판에 치고 나와 금메달을 놓쳤다. 서운했을 것 같다.

“스포츠는 선의의 경쟁이다.”

-MVP도 김길리 선수가 받고, 공항에 람보르길리(람보르기니)도 나오고.

“길리가 2관왕을 했으니 MVP는 당연하다.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김길리의 시대’라고 한다.

“후배들이 자라 선배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저도 그랬고, 후배들도 그렇게 해줘야 한다. 대한민국이 쇼트트랙 강국이 된 비결이다.”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에서 은메달을 딴 최민정 선수가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관중석에 인사하고 있다. 최 선수는 이날 올림픽 은퇴를 선언했다./뉴스1

◇ 훈련만은 양보하지 않아

-지난 10년 ‘최민정 시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뭘까?

“2022년 몬트리올 세계선수권대회 3000m 계주 결승.”

계주 마지막 주자로 3위를 달리고 있던 최민정은 0.034초 차이로 1·2위를 젖히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았다.

-1·2위와 간격이 꽤 벌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가속도가 확 붙더라. 끝까지 질주하면 결승선에 먼저 닿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1위로 들어온 줄 알았던 킴부탱(캐나다)이 얼굴을 부여잡고 경악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쇼트트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웃음).”

-그래선지 최민정 경기는 N차 관람객이 많다.

“한국 선수가 추월을 거듭해 역전하니 짜릿해하시는 것 같다. 도파민도 막 생기고.”

-최 선수도 본인 경기를 다시 보나?

“물론이다. 좋은 감각을 되찾고 싶을 때. 당시 어떤 느낌, 어떤 자세로 탔는지 되짚어본다.”

-평창올림픽 때부터 아웃코스 추월은 최민정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중학생 때부터 아웃코스를 즐겨 탔다. 내 성격과 스케이팅법에 잘 맞았다.”

-인코스로 파고드는 것보다 체력적으로 몇 배 힘들다던데.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스케이팅을 선호한다. 인코스로 파고들면 선수들과 충돌하거나 반칙하기 쉽고, 페널티를 유도하는 상대의 작전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정직하게?

“성격이다(웃음).”

-체력이 관건인데, 훈련을 얼마나 하나?

“시간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대표팀 선수 중 제일 많은 훈련량을 소화하는 것 같다. 체력이 좋아지면 레이스를 더 다양하게 펼칠 수 있어서 훈련 시간만큼은 양보하지 않는다.”

-한쪽 발로 스쿼트 자세를 취한 뒤 점프하는 훈련도 하더라.

“런지 점프라고, 얼음을 밀어내는 하체 힘을 강화하는 훈련이다. 트랙이 짧고 곡선 구간이 많은 쇼트트랙은 원심력과의 싸움이라 고난도 훈련이 많다. 후배들은 지옥 훈련이라고 한다.”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따낸 김길리(오른쪽)선수를 최민정 선수가 축하하고 있다. /뉴스1

◇ 승부에 만약이란 없다

-출발선에 섰을 때 제일 생각이 많다고 했더라.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요즘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날 수행해야 할 목표 한두 개만 떠올린다.”

-천하의 최민정도 평창올림픽 500m 결승에서 실격당하고, 베이징올림픽 500m 결승에서 넘어졌을 땐 멘탈이 크게 흔들렸을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일엔 연연해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앞으로 수행해야 할 목표가 산더미라 돌아볼 시간도 없다. 돌발 상황조차 뛰어넘어야 하는 완벽한 실력을 쌓으려면 훈련을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베이징 1000m, 밀라노 1500m에서 은메달을 땄을 땐 왜 울었나?

“기쁘고 자랑스러워서.”

-금메달이 아니어서 우는 줄 알았다.

“금 따면 저도 좋다(웃음). 그러나 어떤 노력이나 치열한 과정은 색깔로 나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1등도 없고, 영원한 1등도 없다’고 했더라.

“너무 쉽게, 운 좋게 우승하면 자만하게 되고 그만큼 1위 자리를 유지하기도, 발전시키기도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포츠에 만약이란 없다’는 말도 했다.

“변명 같고 핑계처럼 느껴져서. 뒤를 자꾸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쇼트트랙이 더이상 한국의 독무대가 아니더라. 캐나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선수들의 기량이 놀라웠다.

“500m 경우 네덜란드 벨제부르 선수가 거의 남자 선수에 버금가는 기록을 세웠다. 과거엔 그들이 한국 선수들의 훈련 방식, 전략, 장비를 연구하며 쫓아왔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기량과 전략을 분석하면서 따라잡아야 할 판이다.”

-양궁처럼 국내 선발전이 더 치열하지만, 한국 쇼트트랙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선발전 방식을 국제대회 경쟁력에 맞게 개선해야 한다. 빙상장도 여전히 부족하다. 스노보드 선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쇼트트랙 전용 빙상장은 진천선수촌 한 곳이라 대표팀이 돼야만 훈련할 수 있다. 성남 링크장도 펜스가 좋지 않아 부상당하는 선수들이 많다.”

2026년 4월 1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쇼트트랙 최민정 선수가 프리지어꽃을 안고 활짝 웃었다./장경식 기자

◇ 몽골 초원에 누워 별 보기

-‘너는 내 인생의 금메달’이라고 쓴 어머니 편지가 화제가 됐다.

“밀라노 가는 비행기에서 읽고 울었다. 현지에서도 힘들 때마다 꺼내 읽었다.”

-어머니 성격이 시원시원하더라.

“엄마가 우울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믿고 응원해주셨다.”

-편지에 ‘딸을 존경한다’고도 썼더라.

“저도 그 대목에서 놀랐는데, 아마도 제가 그동안 해온 노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 5시면 눈을 떠서 훈련장에 가는 아이였다던데.

“스케이트 타는 게 너무 좋아서. 달릴 때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좋았다. 힘든 것마저도 재미있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시합하러 갔다는 게 사실인가.

“초등학교 때라 생각이 단순했던 것 같다. 엄마와 언니는 다쳤지만 나는 괜찮아서 시합을 하러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웃음).”

-딸 뒷바라지 하느라 온 가족이 이사만 12번을 다녔다더라.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시려고. 집 크기가 자꾸 줄어들어 이상하긴 했다(웃음).”

-징크스가 있는지.

“전날 신었던 스케이트 양말을 그대로 신는다. 스케이트도 왼쪽부터 신는다.”

-별명이 ‘얼음공주’인데, 알고 보면 허당이라고.

“일상에서라도 느슨해지고 싶어서(웃음).”

-책 읽기를 좋아한다더라. 올림픽 기간 중 읽은 책이 ‘건너가는 자’라고 해서 찾아보니 반야심경을 바탕으로 쓴 철학서였다.

“자기계발서를 주로 읽다가 요즘엔 소설, 철학책을 읽는다. 한 자 한 자 천천히 음미하며 사색하는 시간이 좋다. 근데 책 읽는 속도가 느려 완독하는 책은 많지 않다(웃음).”

-공부도 잘했을 것 같다.

“잘하고 싶었다, 하하!”

-쇼트트랙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변수가 많고, 드라마틱하다는 점이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쇼트트랙이다.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

-최민정의 버킷 리스트는?

“세계의 위대한 자연 보러 다니기. 북구의 오로라도 보고 싶고, 몽골 초원에 누워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2026년 4월 1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다 파안대소한 최민정 선수. /장경식 기자

☞최민정

1998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스포츠응용산업학과를 졸업했다. 여섯 살에 스케이트를 시작, 16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2018년 평창올림픽 1500m·3000m 계주 우승, 2022년 베이징올림픽 1500m 우승, 세계선수권 개인 종합우승 4회 등 10여년 간 국제대회 금메달 85개를 따내며 세계 여자 쇼트트랙 최정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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