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뒤죽박죽 봄꽃 개화
“나는 으스대며 (우리 집 마당에) 100가지도 넘는 꽃이 있다고 말했다. (…) 어떻게 그 가짓수를 다 셀 수 있냐 하면 그것들은 차례차례로 오고, 나는 기다리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쯤 펴낸 박완서의 산문집 ‘호미’에 나오는 내용이다. 작가는 호미를 들고 꽃을 돌보며 1번 복수초를 시작으로 차례로 피어나는 꽃을 기다린 것이다.
▶그동안 봄꽃들은 순서대로 피는 편이었다.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절정의 꽃이 바뀌었다. 매화가 피고 나면 산수유, 그다음엔 진달래와 개나리가 하루 이틀 간격으로 피고 목련이 열린 다음 벚꽃이 만개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봄꽃들이 차례로 무대에 등장해 카덴차(연주에서 솔로 악기가 기교적인 음을 화려하게 뽐내는 부분)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올해는 유난히 꽃 피는 순서가 무너졌다. 벚꽃부터 그렇다. 올해 서울의 벚꽃은 유난히 빨랐다. 지난달 29일 최근 30년 평균보다 열흘 앞당겨 피었다. 평년에는 2주 가까이 벌어졌던 서울과 제주의 개화 시점이 올해는 단 하루로 좁혀졌다. 반면 제주도는 벚꽃 개화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벚꽃 없는 벚꽃 축제’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진해군항제가 지난달 27일 개막했는데 서울 개화 시점과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벚꽃이 전국에서 거의 동시에 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벚꽃만이 아니다. 올해 서울에서 벚꽃이 필 무렵 목련, 개나리, 진달래꽃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풍경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이 공개한 개화 시기 예측 지도를 보면, 올해 제주도 아까시나무 개화 예상 시기는 5월 4일인데, 서울은 그다음 날인 5일이다. 광주와 대전은 6일로 오히려 서울보다 더 늦다. 꽃이 일찍 피면서 한꺼번에 피고 지는 ‘압축 개화’ 현상이 뚜렷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식물은 일정 온도 이상의 온도가 쌓여야 꽃이 피는데, 올해 3월 기온이 급격히 오르면서 꽃과 지역에 상관없이 꽃을 피는 ‘적산온도’에 한꺼번에 도달했다.
▶이 정도면 봄의 질서가 무너진 것 아닌가 싶다. 뒤죽박죽 개화에 이어 때 이른 한여름 날씨가 찾아왔다. 특히 올봄엔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두려울 정도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단지 꽃 피는 시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먹이 사슬이 깨지면서 생태계 교란을 일으킬 수 있고, 감염병을 확산시키는 등 사람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어느 해보다 백화난만한 봄이었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이유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낭심 걷어찬 여성 제압했다 재판행...아파트 경비원 무죄
- 소노의 반란은 계속된다...정규리그 1위 LG 3대0으로 제압하고 챔프전 선착
- 지팡이 대신 손수레… 92세 세계 최고령 신문 배달원
- ‘부정선거 감시단 지원자에 출마 홍보’ 김세의, 항소심 무죄... 1심 벌금형 뒤집혀
- [만물상] 마라톤 부족
- 李대통령 ‘알파고 아버지’ 만났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 접견
- 윤우진 전 세무서장 변호인 “윤석열 아닌 윤대진 소개로 수임”
- 이란 외무 “협상 결렬은 미국의 과도한 요구와 잘못된 전략 때문”
- 전주 도심서 승용차 중앙선 침범… 40대 사망·60대 중상
- [단독] 50대 男 민주당사 앞에서 분신 시도... 경찰에 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