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극단 창단·경영도 성공… 해방후 월북, 北 고위직 지내
1940년대 초 일제 경연대회서 남자주연상 3회 수상
6·25전쟁때 서울 남하 위문공연… 폭격으로 팔 잃어
'무대화술'·'화술과 분장' 등 뛰어난 이론서도 남겨

황철이 극단 아랑을 맡으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조선 최고의 인기배우로 연극에 직접 출연하고 극단을 운영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편으로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갔다. 1939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일제가 황국신민화와 국가총동원체제를 내세우며 문화예술계에 선전도구 역할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극단 아랑은 황철의 수완와 단원들의 역량 덕분에 크게 성공했다. 창단 공연작 '청춘극장'을 필두로 '그들의 인생' '정열대지' '임옥균' '동학당' 등이 연이어 히트했다. 이들 작품을 지은 극작가는 임선규였다. 당대 뛰어난 배우를 다수 확보한 데다 홍해성과 안영일 김일영 등 일본 유학파 출신이 연출을 담당했고, 박영호 김태진 김승구 등 실력 있는 작가가 아랑에서 활동했다.
황철의 모나지 않은 성격도 극단의 성공에 큰 힘이 됐다. 낙천적이고 원만한 성격으로 단원들을 잘 융화시키고 이끌었다.

아랑의 간판배우인 차홍녀가 21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일도 겪었다. 그녀는 1940년 12월 초에 철원에서 공연을 마친 뒤 철원역에서 걸인의 손을 잡아주었다가 천연두에 전염돼 사망했다.
황철의 연기력이 더욱 발전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아랑 시절 그는 연출가 안영일로부터 캐릭터의 내면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안영일은 대중적인 신파극조차 세련된 무대와 연기지도로 연극의 수준을 높였다. 홍해성에게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감정과 사실적인 대사처리를 배웠다면, 안영일한테는 캐릭터의 내면을 잘 담아내는 기법을 배웠다.
작고한 배우 김동원은 황철의 목소리가 바리톤에 가까웠는데,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맑으면서 정감이 깃들었다고 회고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과 온화한 성품, 단아한 행동이 배우로서 적격이었다고 한다. 반듯한 얼굴과 타고난 목소리, 연기에 대한 각고의 노력 덕분에 완성형 배우가 된 것이다.
황철의 실력은 연극대회 수상 경력에서 잘 나타난다. 일제는 1940년 조선연극협회, 1942년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를 만들어 모든 연극 및 문화단체에게 참여토록 강요했다. 황철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연극협회로 하여금 열게 한 연극 경연대회에서 1~3회 연속 남자주연상을 받았다.
친일의 경력도 쌓이기 시작한다. 1941년 극단 아랑은 국민연극인 '인생설계'를 무대에 올렸다. 과학의 중요성을 선전하는 작품으로 과학자로 출연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적국인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의 악행을 고발하는 연극 '삼대'에도 등장했다. 1942년에는 총독부 산하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제작한 영화 '젊은 모습'에 출연, 학생들에게 황국신민이 되라고 가르치는 선생 역을 연기했다. 총독부는 징용과 징병 독려, 내선일체, 물자절약 등을 강조하는 국민연극을 강요했다.

여성 편력 때문에 물의를 빚기도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을고' 공연 시절 동양극장 앞에는 기생들이 황철을 모시기 위해 보낸 인력거가 줄지어 서 있었다. 평소에도 바람기를 통제하지 못했는데 결국 사고를 쳤다. 선배 양백명의 아내인 배우 문정복과 정분이 난 것이다. 황철은 동양극장 시절 호화선 소속 배우였던 이정순과 결혼한 터였다. 더구나 문정복은 황철의 아내 이정순의 친구였다. 당시 통념으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연극협회는 문정복을 제명시키고, 황철은 그 인기를 무시할 수 없어 시말서만 받는 방식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함세덕 서일성 박민천 김선영 조미령 김복자 이해랑과 함께 낙랑극회를 창단했다. 창단작품인 '군도'를 비롯 '호접' '뇌우' '바람부는 시절' 등이 꽤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신파 연극과 미국 영화가 유행하면서 흥행이 안돼 급기야 극장을 빌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남북 이념 대결의 한 복판에 서게 된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계에도 이념 대결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가 평소 이념적 색깔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남천과 함세덕의 권유에도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2월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의대회에 찬조연설을 했고, 11월에는 남로당 결성대회에 연극인 대표로 축사를 했다. 12월에는 조선연극동맹 서울지부 결성식에 참석하고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2월 남조선문화옹호문화예술가 총궐기대회가 열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 예술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졌다. 낙랑극회의 얼굴인 황철도 민중극장의 심영, 예술극장의 박학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러나 황철은 경찰인 친구의 도움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당시 조선연극동맹은 연극 대중화를 목적으로 동맹 산하 7개 극단을 4개의 문화공작단으로 재편했다. 황철은 3번째 극단인 민족극장을 맡아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춘천에서 공연을 하다가 우익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48년 5월 미군정이 극장의 입장세를 대폭 올려 원성이 일었다. 연극인들 사이에는 북한에서 연극인들에게 극장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좌익예술가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자 연극인들이 대거 월북하게 된다.

황철은 1948년 8월 북한 연극계를 둘러보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사리원의 형무소에 수감돼 사상교육을 받은 뒤 연기 현장에 복귀했다. 평양 국립극장의 배우로 나서 이듬해 코르네츄크 작 '외과의 크레체크', 신고송 작 '불길'에 출연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과 함께 남하하여 서울 위문공연에 얼굴을 드러냈다. 직접 작품에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무대 인사를 하자 팬들의 환호가 엄청났다고 한다. 황철은 위문공연을 하면서 서울을 거쳐 인천, 수원,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향하던 중 큰 불행을 만난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오른쪽 팔을 잃은 것이다. 서울의 병원으로 후송되는 과정에서 과다출혈로 중태에 빠졌지만 주변의 수혈로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황철은 불구가 됐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연극에 필요한 소품도 직접 만들었다. 헝가리에서 제작된 의수를 끼고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1953년 조영출 작 '이순신 장군'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관객들은 그가 의수를 낀 것을 모를 정도로 열연을 펼쳤다. '우리 마을' '설봉산' '춘향전'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1952년 공훈배우, 55년에는 북한 최초로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참전공로로 1급 수훈자가 됐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국립연극극장 총장을 지냈으며, 1958년에는 교육문화성 부상(차관)을 역임했다. 1961년 6월 49세를 일기로 사망,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가 무대경험을 토대로 지은 '무대화술'과 그의 사후 원고를 모아 발간된 '화술과 분장'은 연극사의 역저로 손꼽힌다. 현대 연극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러시아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사실주의 이론을 현장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서술했다. 연출가가 아닌 배우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캐릭터를 구현해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한국 연극사에서 황철은 연기와 이론에 모두 빼어났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처음에 신파극 배우로 출발했으나 연출가 홍해성과 안영일을 만나 정통 사실주의 연극을 배웠다. 여기에 타고난 음성과 부단한 노력이 더해져 당대 최고의 배우가 됐다. 연극계는 그에게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이는데 반대하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친일과 월북을 이유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도 엄혹했지만 사후의 현실도 여전히 녹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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