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살아간 아르데코 여왕 [리뷰]

이혜진 선임기자 2026. 4. 1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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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렘피카
차갑고 우아한 무대 미술, 강렬한 색채 압도
폭발적 음악은 열정적 삶 입체적으로 그려
“시대 앞서간 복잡한 여성…현재 관객도 공감”
타마라 드 렘피카 역 김선영/ 제공 놀유니버스

197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원의 한 벤치. 노년의 귀부인이 빈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막이 오른다. 뮤지컬 ‘렘피카’는 아르데코 미술의 여왕으로 불리는 실존 인물 타마라 드 렘피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무대 위에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러시아의 명문 렘피키 가문의 타데우스와 결혼하며 유복한 귀족 생활을 누리던 타마라 드 렘피카.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의 파고를 피해 파리로 망명하면서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붓을 들면서 그녀는 예술가로 다시 태어난다. 이 작품은 격동의 현대사 속을 온몸으로 살아낸 한 여성의 욕망과 투쟁, 그리고 예술을 향한 집념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무대 미학이다. 차갑고 우아한 선의 구조물이 배경을 이루고, 감각적인 조명이 색채를 입히며 아르데코 양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렘피카의 작품 세계에 영감을 받아 설계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회화로 기능한다. 특히 무대 양쪽에 자리한 작은 프레임에는 극의 흐름에 맞게 렘피카의 회화 작품들과 당시 동영상 등을 유기적이고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단순한 배경을 넘어 극에 입체성을 더하는, 연출의 세련된 미감이 돋보이는 선택이다.

무심한 표정,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매끄러운 표면과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낸 관능적인 여성들. 렘피카의 그림처럼 이 뮤지컬 역시 욕망에 솔직하다. 렘피카를 단순히 성공한 예술가나 시대의 피해자로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러시아 혁명, 2차 세계대전이라는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사랑과 야망, 생존 사이를 오간 복잡한 인물로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세상을 바꿀 순 없어. 바꿀 수 있는 건 네모난 캔버스 하나뿐”이라는 대사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삶을 개척해간 여성의 정신을 담아낸다.

렘피카 공연 장면/제공 주식회사 놀유니버스

렘피카 역을 맡은 김선영은 캐릭터에 대해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라며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삶을 산 시대의 아이콘이지만, 저는 그 안에서 보편성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 이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려 했던 여성의 모습은 오늘날 관객들이 자신을 투영해 볼 만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음악 역시 강렬하고 다채롭게 극을 완성한다. 록, R&B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격변하는 시대와 그 한가운데서 분투하는 주인공의 열정을 관객의 귀와 마음에 직접 새긴다. ‘우먼 이즈’ ‘더 뉴 우먼’ 등 대표적인 넘버는 렘피카의 뮤즈인 라파엘라,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러 여성들에 대한 헌사다.

배우들의 열연은 때론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렘피카라는 인물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끔 한다. 렘피카 역에는 김선영, 박혜나, 정선아가 각기 다른 매력으로 렘피카를 되살려 놨고, 라파엘라 역의 차지연, 린아, 손승연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관능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작곡가인 맷 굴드는 “한국 배우들의 연기를 처음 보고 엉엉 울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녹색 부가티의 타마라 자화상

작품 곳곳에서 렘피카의 그림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마지막 장면에선 렘피카의 주요작들이 무대 위에 등장하며 그녀의 삶과 예술을 하나로 포개어 보여준다. 레이첼 채브킨은 “렘피카는 연약한 인간들을 화폭에 올려 상징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며 “그녀의 그림이 가진 강렬한 에너지를 무대 위에 담아내는 동시에, 그녀가 그려낸 여성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연출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202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그해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아시아 초연인 이번 공연은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일부 장면을 보강하는 등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6월 21일까지.

이혜진 선임기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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