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침을 읽다] 봄날에 - 오세영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잎새 피어난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잎새 피면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의 그 /꽃그늘을,
▶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지만, 대지가 생명을 밀어 올리는 기척은 매번 경이롭다. 메마른 가지 끝에 수액이 차오르고 연약한 새순이 돋아나는 과정은 정교한 설계도 없이도 어김이 없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건만 겨울의 끝에서 봄의 시작을 읽어내고, 연약한 잎들이 모여 이내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순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가르침이다.
오세영 시인은 이 자명한 우주의 질서 위로 인간의 가장 깊고 내밀한 감정인 '사랑'을 겹쳐 놓는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사랑의 환희에 머물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서늘한 자각으로 나아간다.
시의 전반부가 자연이 스스로 깨우치는 '무위(無爲)의 앎'을 노래한다면, 후반부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의 깨달음'을 향한다. 시인이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사랑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묵직한 통찰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빛으로, 슬픔을 어둠으로 분리해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과 그 아래 드리운 '꽃그늘'을 하나의 풍경으로 묶어낸다. 빛이 강렬할수록 그늘은 더욱 짙고 선명해지는 법이다. 잎새가 피어나는 순간 그늘이 함께 태어나듯,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라는 슬픔의 경계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이 말하는 '꽃그늘'은 사랑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후유증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정점에서 동시에 자라나는 숙명적인 슬픔의 실체다.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의 생명력이 사실은 눈부신 슬픔의 다른 이름이라는 통찰은 경이롭고도 아프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깊듯, 사랑의 기쁨만 취하고 슬픔을 거부하는 것은 봄에 잎만 무성하고 그늘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과 같기 때문이다.
이 불가항력적인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슬픔은 절망의 빛깔을 벗는다.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
Copyright © 인천일보 All rights reserved - 무단 전재, 복사,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