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식초가 되는 시간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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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기 전 산책을 나선다.
얼마 전 정말 감이 식초가 되었는지 보려고 뚜껑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감이 식초가 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구나.
감이 식초가 되는 시간을 우리 같이 지나왔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감이 식초가 되더라고, 시간이 만든 맛을 내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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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희 | 소설가
아침을 먹기 전 산책을 나선다. 아침마다 ‘코 인사’를 하는 길고양이 녀석이 강아지처럼 따라오다 수룡 저수지 입구에서 멈춘다. 딱 거기까지가 돌아갈 수 있는 영역인 모양이다. 저수지를 돌 때마다 물 위로 솟은 돌부리에 앉아 있는 가마우지 두마리도 만난다. 겨울에도 눈 쌓인 저수지 돌부리에 앉아 있더니만 봄이 되었는데 여전히 같은 시간 꼭 둘이 붙어 앉아 있다. 산책하는 동물들이 우습다고 구경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저수지 산책로에 떨어진 참새를 보았다. 나무 그늘도 없는 맨땅에 떨어진 작은 몸은 마지막까지 날다가 허공에서 떨어진 것일까. “어떻게 떨어지는지 몰라 종달새는 허공에서 죽었”다던 어느 시의 구절이 떠오르는 사월의 아침이었다.

논과 밭두렁에는 봄까치풀, 꽃마리, 별꽃, 꽃다지, 애기장대, 깽깽이풀, 광대나물, 제비꽃, 민들레와 씀바귀, 냉이꽃이 피었고 집집마다 무더기로 핀 수선화 옆에는 무스카리와 튤립이 올라오고 있다. 흙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벚꽃이 떨어지고, 마을 입구에 선 자목련도 만개했다. 이렇게 환한 봄날 산책길에 자꾸 빈집이 보인다. 빈집의 사연도 조금씩 얻어들었다. 술 먹고 경운기를 몰다 외진 밭두렁에 빠져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셨다는 분, 혼자 살다가 죽을 때를 알고 집에서 나와 밭둑에 쓰러져 장례를 치렀다는 분…. 빈집을 지키는 나무들을 본다. 밭 가운데 있는 빈집은 벽이 다 부서지고 지붕도 뚫렸는데 동백이 빨갛게 피었다. 그 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시목마을은 감나무 시(柿) 자를 쓰는 감나무골인데, 그 집 감은 토종이라고 했다.

이사 오던 해 겨울, 반장이 준 감 따는 막대기를 들고 중년의 남자 둘과 여자 둘이 속이 시원할 정도로 깔깔 웃으며 그 집 감을 털었었다. 삼발이 가득 감이 실렸다. 감을 다 깎을 수 없어서 동네 분들에게 나눠주고 감말랭이로 말리고 곶감으로 처마에 걸어도 남아 감식초를 만들었다. 이웃집 할머니가 감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아내고 항아리에 담으면 식초가 된다고 했다. 감만 항아리에 넣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식초가 된다고? 항아리에 감을 넣고 밀봉한 채 한해를 보내고, 면포에 감을 걸러내고 감물만 받아 또 한해를 보냈다. 얼마 전 정말 감이 식초가 되었는지 보려고 뚜껑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펑, 소리와 함께 새콤하고 달달한 냄새가 퍼졌다. 찍어 먹어보니 내가 아는 식초 맛이었다.
감이 식초가 되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구나. 그 시간이 내가 사는 공간을 채우고 있다. 고양이의 영역처럼 시간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시간 속에는 불안함도 깃들어 있다. 얼마 전 한밤중에 윗집으로 응급구급차가 왔었다. 우리와 같은 해 이사 온 부부가 사는 집이다. 공무원으로 은퇴하고 귀촌한 그 집 아저씨가 고열과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병원에서 돌아온 아저씨는 쓸개 빠진 사람이 되었다며 웃었지만,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서울에서 병원 치료를 시작한 윗집이 비어 있다. 짐을 챙기러 잠깐 다니러 온 윗집 언니는 고양이 사료를 한봉지 내밀며 그 집에 찾아오는 길고양이 밥을 챙겨달라고 했다. 매일 찾아오는 고양이를 걱정하는 그 담담함이 얼마나 쓸쓸하던지 눈물이 차올랐다. 언니도 불안하고 서러운 한숨과 울음을 쏟아냈다. 평생 밥벌이 일도 할 만큼 했고, 부모와 자식 걱정 없이 둘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려고 이곳에 왔는데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다음에 언니가 오면 감식초 한병을 들고 윗집에 올라가 봐야지. 감이 식초가 되는 시간을 우리 같이 지나왔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감이 식초가 되더라고, 시간이 만든 맛을 내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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