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깨우는 무대…경계를 지운 ‘앙상블’
송중기·김소현 등 특별출연… 무대에 자연스레 녹아든 ‘함께’의 순간

“사랑하는 나의 슈슈….”
객석의 조명이 낮아지고 무대 위에 잔잔한 목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영어로 이어진 편지는 곧 한국어로 이어졌다. 배우 송중기와 그의 아내 케이티 사운더스가 나란히 앉아 들려준 이 내레이션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자, 관객을 어린 시절로 이끄는 첫 문장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정원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 네가 절대로 어린이의 정원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빠가.”
편지가 끝나자 음악이 이어졌다. 드뷔시의 ‘어린이 세계’ 중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 장난스럽고 유쾌한 선율이 흐르며 무대는 배경 속 명작 그림과 함께 하나의 장면으로 바뀌었다.
지난 18일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 챔버홀에서 열린 가온 솔로이스츠 제7회 정기연주회 ‘Kinderszenen 어린이 정경’은 단순한 연주회가 아니었다. 이야기와 음악이 맞물려 하나의 서사가 완성되는 무대였다.
이번 무대는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공연 초입 사자, 코끼리, 백조로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됐고, 무대 뒤편에는 동물 그림이 움직이는 영상이 함께 펼쳐졌다. 이 영상은 케이티 사운더스의 아이디어로 더해진 연출이었고, 동물 그림은 가온 솔로이스츠 단원인 노제하 양의 작품이었다. 음악과 시각, 그리고 이야기가 맞물리며 무대는 하나의 살아있는 풍경처럼 펼쳐졌다.
초반, 관객의 시선은 무대 한 켠의 배우들에게 머물렀다. 그러나 곡이 이어질수록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주자들에게 옮겨갔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이어지는 박수는 점점 더 길어졌고 이 공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연주자들 스스로 증명해 나갔다.

가온 솔로이스츠는 장애·비장애 음악가가 함께하는 실내악 단체다. 그러나 이날 무대에서 그 구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가운데·중심’을 뜻하는 ‘가온’이라는 이름처럼, 무대 위에서는 모두가 중심이었다.
한 파트를 장애 연주자가 이끄는 장면에서도 어색함은 없었고, 실력의 차이를 가늠하려는 시선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음악이 흐르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연주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연주자들의 표정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음악을 즐기듯 연주하고 있었다. 단순히 잘 연주하는 무대가 아니라 함께하는 순간 자체를 누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진심은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공연 후반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기억을 건드렸다. 한국 동요 모음곡과 존 덴버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영화 ‘시네마 천국’의 선율 등 익숙한 곡들이 이어졌다. 평소 알고 있던 멜로디였지만 이날만큼은 다르게 들렸다. 연주자들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음악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새롭게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이날 무대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무대 위에 오른 이들의 ‘참여 방식’에 있었다. 송중기와 케이티 사운더스 부부, 뮤지컬 배우 김소현 등 이름만으로도 화제를 모을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무대의 중심에 서기보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을 택했다.
강자연 가온 솔로이스츠 대표는 “지인을 통해 공연 소식을 듣고 먼저 함께하고 싶다는 연락을 주셨다”며 “단순한 출연을 넘어 리허설부터 공연 전 과정을 함께하며 진심으로 참여해 주셨다”고 전했다. 실제로 송중기 부부는 리허설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무대의 일부로 함께 했다. 케이티 사운더스는 무대 영상 연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등 공연의 디테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뮤지컬 배우 김소현 역시 이날 무대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당일 저녁 공연이 예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를 위해 시간을 쪼개 무대에 올랐다. 평소 하루 두 차례 공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공연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연주자들의 준비와 연주가 너무 아름다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며 오히려 연주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 결과, 누구 하나 튀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하는 무대가 완성됐다.

공연의 정점은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신윤 황과 발달장애 연주자 백승희가 함께한 무대였다. 이들의 연주는 단순한 협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윤 황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일정으로 내한했다가 귀국 당일 이번 공연을 위해 곧바로 공항에서 연습실로 향했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무대를 위해 시간을 내며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췄다.
제자인 김유영 음악감독과의 오랜 인연, 그리고 김 감독이 15년간 지도해 온 제자 백승희. 스승과 제자, 그리고 그 제자가 다시 이어낸 무대였다. 김 감독은 무대에서 “20년 전 쥴리어드 스쿨에서 혼자 연습하던 시절, 음악은 사람들과 나눌 때 더 값진 것이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며 “오늘 이 무대에서 그 말을 비로소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어 “함께 나누었을 때 음악은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만들어내고, 기적 같은 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신윤 황 역시 “오늘 함께하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다”며 “연주자들과 그 가족들이 쏟아온 시간과 노력이 느껴졌다. 요즘처럼 모두가 어려운 시기일수록 함께하는 음악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전했다.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시네마 천국’ 중 ‘사랑의 테마’는 이날 공연의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순간이었다. 설명보다 더 강하게 전달되는 감동, 그 자체로 충분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박수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어진 앙코르 무대, 비제의 ‘갈롭(Gallop)’은 마지막까지 경쾌한 에너지로 객석을 채웠다.
이날 무대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음악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얼마나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지를 증명했다.
공연을 지켜본 김귀선 씨는 “가족이 연주자로 참여해 종종 공연을 보지만, 혼자가 아닌 앙상블로 무대에 선 모습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며 “장애를 넘어 이렇게 함께 연주할 수 있다는 점이 깊이 와닿았다”고 말했다.
가온 솔로이스츠의 여정은 이 무대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는 10월에는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쥴리어드 스쿨과 함께하는 공연을 앞두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 무대로 이어지는 이들의 발걸음은 ‘함께하는 음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가능성이다.
이들의 활동 배경에는 기업의 지속적인 후원도 자리하고 있다. HS효성은 가온 솔로이스츠의 취지에 공감해 꾸준히 지원을 이어오고 있으며, 서울문화재단 역시 이번 공연을 후원하며 무대가 마련됐다. 음악을 통해 ‘함께’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시도는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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