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33. 조선왕릉 의릉
동원상하릉 구조에 담긴 풍수적 배경과 왕릉 배치의 특징
당쟁 속 희생된 선의왕후와 경종, 비운의 왕실 서사 조명

의릉은 20대 경종(景宗)과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경종은 숙종 14년 1688년 11월에 숙종과 희빈 장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후에 영조가 되는 동생 연잉군보다 여섯 살 많은 이복형이다. 숙종이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이고,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아 권세가 대단했던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기 전에 원자 책봉을 받았고, 송시열 등 노론의 반대가 심했으나, 소론의 지지를 받아 4살 때 세자 책봉을 받았다. 숙종 말년에는 부왕인 숙종이 지병이 심해지자, 경종은 대리청정을 맡기도 하였고,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추존된 첫 번째 부인인 단의왕후(端懿王后)는 세자 때인 18세에 혼례를 올리고 경종이 보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 31세의 나이에 소생 없이 요절한다. 그해 11월 선의왕후가 14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경종이 즉위한 1720년에 왕비가 된다. 선의왕후는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그러나 딸인 선의왕후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론으로 전향하면서 영조와 철천지원수이자 정적이 되었다.


경종은 후사가 없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17세의 중전 선의왕후는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자 지위를 흔들었던 시동생 연잉군 대신 소현세자의 현손(玄孫)이자, 밀풍군의 장남이며 경종의 9촌 조카인 관석(觀錫)을 경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 이를 감지한 노론의 반격으로 선의왕후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이 일로 인해 시동생 연잉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경종 승하 후 영조로부터 6년간 비참한 대우와 시달림으로 26세에 자녀 없이 승하한다. 노론과 소론의 기나긴 당쟁 속에서 이복동생 연잉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실록에서 전하는 바로는 경종과 연잉군의 형제간 우애는 각별했다. 연잉군은 경종 즉위 이후 '황형'이라 부르며 예우했고, 대계(大繼)를 생각한 경종도 우애를 표했다고 한다. 경종 자신도 아버지 숙종의 의심과 변덕으로 생모와 외삼촌이 죽음까지 당한 골육상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다. 비록 이복동생 연잉군이 마음에 안 들었어도, 이복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쟁을 벌여서 조정에 피바람과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는 것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병증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죽는 모습을 14세의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처럼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 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견제를 하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경종의 불임과 관련된 야사 이야기이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아 죽기 전에 세자[경종]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악독한 말을 퍼부으며 세자의 성기를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경종은 연잉군이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게장과 감을 먹고 난 뒤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러한 근거로 세제(世弟)가 의도를 가지고 게장과 감을 올려 경종을 죽게 했다는 '경종독살설'이 퍼진다. 이 독살설은 재위 내내 영조를 옥죄게 된다.

경종이 승하하자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6년 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특이하게도 왕의 능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줄기의 맥이 좁아 왕의 릉과 왕비의 릉을 좌우 쌍릉으로 할 경우 폭이 좁은 생기(生氣)가 정혈을 비켜 가기 때문에 좌우로 쓰지 않고 상하 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17대 효종 영릉이 최초이고, 이후 20대 경종의 의릉이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릉 40기 중 효종의 영릉과 경종의 의릉 등 2기만 동원상하릉의 형태이다.

1962년 천장산 자락에 위치한 의릉 능역(陵域) 내(內)에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의 건물이 들어왔다.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고, 곳곳에 건물을 짓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심하게 훼손하여, 능역 원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250년 이상 보존되어 온 의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과 함께 능역이 가장 많이 훼손된 왕릉이다. 다행히 1996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탈바꿈해서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고 현재는 기본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경종은 조선왕조에서 2대 정종, 13대 명종, 25대 철종 등과 함께 존재감 없는 왕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대의를 위해 동생의 허물과 욕심을 다그치지 않았던 왕이었다. 살아서도 왕인 자기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이복동생 영조에게 짓눌림을 받아야 했고, 죽어서는 중앙정보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에 조롱을 받은 곳이 바로 의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