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절망 딛고 얼음 위에 던진 ‘희망 스톤’…“비관 말고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김용국 기자 2026. 4. 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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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 출전한 ‘위대한 사제’ 차진호 선수·장창용 교수

20일은 제46회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라는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장애인 스포츠 선수들의 땀방울은 우리 사회에 늘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지난달 막을 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패럴림픽' 휠체어 컬링 종목에서 2018년 평창 패럴림픽 이후 8년 만에 4인조 혼성 4강 진출의 쾌거를 일궈낸 차진호 선수와 국가대표팀 멘탈코치 장창용 교수(국립경국대학교 체육학과)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국가대표팀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국립경국대학교에서 성인학습자학부 스포츠레저학과 학생과 체육학과 교수로 만나 끈끈한 사제지간의 연을 맺고 있다. 대구일보는 지난 16일 국립경국대학교에서 두 사람을 만나 밀라노 패럴림픽의 뒷이야기와 절망의 끝에서 다시 피어난 삶의 궤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밀라노의 빙판, 위기의 순간 빛을 발한 '멘탈 루틴'

2026 밀라노 패럴림픽은 휠체어 컬링 대표팀에게 잊을 수 없는 환희와 뼈아픈 눈물을 동시에 안겨준 무대였다. 8년 만의 4강 진출이라는 훌륭한 성과 뒤에는 결승행 티켓을 아깝게 놓친 캐나다전의 짙은 아쉬움이 서려 있다. 7엔드까지 경기를 리드하다 통한의 역전패를 당한 직후, 선수들이 느낀 충격과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치명적인 위기의 순간, 스승이자 멘탈코치인 장창용 교수의 진가가 빛을 발했다. 장 교수는 침통해진 라커룸으로 들어가 흔들리는 선수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결과에 마음을 뺏기지 마십시오. 오직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다음 스톤의 '과정'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장 교수의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은, 차진호 선수가 다시금 평정심을 되찾고 얼음판 위에 앉을 수 있게 한 강력한 중심추가 됐다. 차 선수는 "눈앞이 하얗게 변할 때, 연습했던 과정만 생각하라는 교수님의 그 한 마디가 빙판 위에서 쥘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무기였다"고 회상했다.

◆빙판 안팎을 잇는 단단한 신뢰, '사제(師弟)의 시너지'

두 사람의 인연은 2018 평창 패럴림픽을 앞둔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멘탈 교육을 접했을 때만 해도 "컬링에 멘탈 훈련이 과연 필요한가"라며 반신반의했던 차진호 선수는, 숨 막히는 세계 무대의 중압감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장 교수를 인생의 가장 든든한 스승이자 길잡이로 따르게 됐다. 이 단단한 신뢰는 경기장을 넘어 배움의 전당으로 이어졌다. "공부를 통해 더 넓은 미래를 설계해 보자"는 장 교수의 진심 어린 권유에, 차 선수는 남양주에서 안동까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국립경국대 성인학습자학부에 입학했다.

국가대표팀 내에서 '교수와 제자'라는 특수한 관계는 자칫 묘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었다. 훈련장에서 장 교수의 발걸음이 무의식적으로 제자인 차 선수에게 먼저 향하다 보니 일순간 팀 내의 시선이 집중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 교수는 철저히 공과 사를 구분하며 중심을 잡았고, 차 선수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동료 선수들과 코치진 사이의 오해를 푸는 '소통의 윤활유' 역할을 자처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끈끈한 유대감은 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최고의 시너지가 됐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 빙판 위에서 다시 쥔 '희망의 스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기까지, 차진호 선수가 지나온 길은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가시밭길이었다. 2002년, 성실하게 펜션을 운영하던 평범한 가장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여름 성수기가 지나고 손님이 뜸해진 가을 비수기,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잠시 나섰던 벌목 아르바이트 현장에서였다. 동료가 베어낸 나무가 예고 없이 그를 덮쳤고, 그는 하반신 마비라는 가혹한 판정을 받았다. 3년이라는 기나긴 병원생활 중 그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것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배변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어두운 절망의 터널 속에 갇혀 있던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스포츠'였다. 2006년 처음 휠체어 컬링을 접한 그는 하반신 마비 특성상 혈액순환이 안 돼 발끝이 얼어붙는 빙판 위에서의 고통을 묵묵히 삼켜냈다. "저 팀만 이기면 우리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동료의 한 마디에 가슴 깊은 곳의 승부욕이 뜨겁게 깨어났고, '세계 최고의 세컨드 선수가 되겠다'는 독기로 차가운 스톤을 쥐었다. 평창 패럴림픽 이후 닥쳐온 슬럼프와 은퇴의 기로에서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한계를 두지 말라는 스승 장 교수의 굳건한 믿음, 그리고 사고 직후부터 묵묵히 간병을 도맡아 준 가족들의 눈물겨운 헌신이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향한 호소…"세상 밖으로 나오세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차진호 선수는 병상과 방 안에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전국의 동료 장애인들을 향해 진심 어린 호소를 던졌다.

"사고 직후 저 역시 모든 것을 비관하고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리,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정말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장애를 입고 방 안에만 웅크려 계신 분들이 있다면, 부디 두려워하지 말고 방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주 작은 자립부터 하나씩 시작해 당당히 세상과 부딪혀 보십시오."

오랜 시간 국가대표 멘탈 코치로서 수많은 장애인 스포츠 선수들을 지켜봐 온 장 교수 역시 심리학의 '자기결정성 이론'을 빌려 희망을 보탰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율성'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곁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가족들과의 '관계성'을 단단히 하고, 자신이 이 사회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유능성'을 증명해 낼 때, 장애는 비로소 두 번째 삶의 빛나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바라보는 더 큰 내일

패럴림픽의 성화는 꺼졌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차 선수는 대회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당장 오는 6월 시작되는 리그전 우승과 4년 뒤 패럴림픽 국가대표 유지를 목표로 맹훈련에 돌입했다. 장 교수는 제자 차 선수가 석·박사과정까지 진학해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응원하며, 8년 뒤 자신이 유학했던 미국 유타에서 열리는 패럴림픽 무대에서 우리 선수들이 맹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 꿈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대구일보 독자들을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독자 여러분께서 휠체어 컬링에 보내주시는 관심과 응원이 저희에게는 가장 뜨거운 원동력입니다. 장애인 선수들이 우리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빙판 위에서 계속 기적을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변함없는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장애라는 단단한 빙벽을 깨고 쉼 없이 전진하는 차진호 선수와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스승 장창용 교수. 서로를 끝까지 믿고 의지하며 더 큰 무대를 향해 나아갈 두 사람의 내일을 응원한다.

김용국 기자 kyg@idaegu.com
지난 16일 국립경국대학교에서 대구일보와 인터뷰를 진행 중인 장창용 교수(왼쪽)와 차진호 선수. 김용국 기자
'2026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에 출전한 차진호 선수(왼쪽)와 장창용 교수가 라커룸 태극기 앞에서 밝게 '엄지척'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창용 교수 제공
장창용 교수가 '2026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 현지 라운지에서 국가대표 선수단과 전략 및 멘탈 코칭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장창용 교수 제공
'2026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에서 신중하게 스톤을 투구하고 있는 차진호 선수(앞쪽 가운데). 장창용 교수 제공
'2026 밀라노 동계 패럴림픽'에서 신중하게 스톤을 던지고 있는 차진호 선수(맨 앞쪽). 장창용 교수 제공
지난 16일 국립경국대학교에서 대구일보와 인터뷰를 진행 중인 장창용 교수(왼쪽)와 차진호 선수. 김용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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