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다리를 놓고, 이웃을 보살폈다···멜라콩 박길수의 시대를 앞선 돌봄과 나눔[생사고투]

김종목 기자 2026. 4. 1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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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역 택시 승차장 뒤편 담벼락엔 ‘멜라콩 다리’라고 쓰인 작은 표지석 하나가 있다. 준공일인 ‘1964년 4월 20일’과 함께 이 다리를 만든 ‘정모’ ‘박길수’의 이름도 적혔다. 길을 오가는 이들은 이 표지석의 존재를 알기 힘들다. 대략 세로 60㎝, 가로 30㎝ 크기의 표지석은 전봇대 옆 시멘트 담벼락에 안내판도 없이 잔해처럼 박혔다.

‘멜라콩 다리’와 ‘멜라콩 박길수’의 역사를 아는 이들만이 표지석 위치를 기억한다. 이들은 20일이면 준공 61년을 맞는 다리 건립자 박길수의 행적과 존재가 잊힐까 걱정한다. 목포역 하역 노동자로 40여 년을 산 박길수 삶을 기리려 한다. 그는 고되고 힘든 시절 요즘말로 하면 돌봄과 복지, 나눔과 연대의 표상 같은 인물이었다.

박길수는 1928년 태어났다. 소아마비를 앓았다. 얼굴 대칭도 차이가 있어 놀림을 많이 받았다. “천성이 긍정적이고도 부지런했다”(<목포시사>)고 한다. 열두 살 때 큰 형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었다. 가족은 목포로 가 과일 노점을 했다.

목포 향토문화연구가 박승은 기자와 통화하며 “보성에서 먹고살 게 없으니까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목포로 왔다”고 말했다. 박승은 중학생이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박길수와 알고 지냈다. 멜라콩 다리 건설 때도 참여한 인물이다. 여러 기록엔 장흥이 고향이라고 나오는데, 박승은 “박길수 고향은 보성이다. 장흥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했다.

목포역 택시 승차장 뒤편 담벼락에 잔해처럼 박힌 멜라콩 다리. 손영득씨 제공

박길수는 부모 노점 일을 도우며 목포역 대기실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역내 청소를 하곤 했다. 이 모습이 목포역 하역 노동자 정모의 눈에 띈다. 정모의 조수로 일하다가 열일곱 살 때 수습 ‘아카보(あかぼう·赤帽·적모)’가 된다. 아카보는 일제 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역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짐을 나르던 하역 노동자 즉 ‘짐꾼’을 일컫는 말이었다.

멜라콩이라는 별명도 일하면서 얻었다. 한 일본 영화에 나오는 사무라이의 부하 까불이 캐릭터 배우와 닮아 생긴 별명이라고 많이 알려졌다. 박승은 “당시 역장이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사무라이와 닮았다며 멜라콩이라고 부른 게 별명이 됐다. 그 역장이 책인지 그 인물 그림 같은 걸 보고 붙인 듯하다”고 했다.

박길수는 직업윤리가 투철했다. “평소 몸이 불편해 수입이 적어도 고객에게 팁을 요구하지 않았고, 돈지갑을 발견하면 꼭 주인에게 돌려주었다”(<목포시사>)고 한다. 하역만 열심히 한 건 아니다. 박길수는 다른 사람이 개의치 않거나 어쩔 수 없다고 여긴 상황을 그저 두지도 않았다. 그는 이 점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났다. 멜라콩 다리 건설에선 추진력도 발휘한다.

빨간 원 표시가 멜라콩 다리 위치다. 카카오맵 갈무리

1960년대 초까지 목포역이 있는 호남동과 건너편 상락동 경계로 개울이 흘렀다. 목포역 자리는 원래 바다였다. 매립 뒤에도 역 주변에 물이 들어오곤 했다. 해산물 장수들이나 통학생들이 개울을 멀리 돌아 역으로 가느라 기차를 놓치곤 했다. 아이들은 철길 위를 위험하게 뛰어다녔다.

“인품이 훌륭하고, 선하며 용감한 사람, 사람 돕는 걸 좋아하던 사람”(박승)이었던 박길수는 ‘1년에 한 번은 남을 돕는 착한 일을 하자’는 ‘일년일선(一年一善)’을 신조로 삼았다. 다리는 그 첫 실천 대상이었다. 목포시청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뒤로 자신이 직접 다리를 놓기로 한다.

푼푼이 모은 자기 돈 6000원을 내고, 여기저기 1만원의 사채까지 빌렸다. 1963년 기준 삼양라면 1봉지가 10원, 자장면값이 25원 할 때다.

모금도 들어갔다. 이 일은 저항에 부딪혔다. <목포시사>를 보면 “자기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꼴값을 떤다”는 비하, 차별, 혐오의 말들을 들었다. 개울을 따라 가게를 낸 상인들은 다리가 생기면 손해를 볼까봐 박길수를 폭행했다고도 한다.

박길수는 이런 저항에 굴하지 않고 다리 공사에 들어간다. 박길수의 ‘선한 의지’에 감복한 이들이 성금을 냈다. “통나무를 세우고 구멍 뚫린 철판을 깐 게 다”인 이 작은 다리은 많은 이들의 불편을 해소하며 목포의 상징이 됐다. 공공이 할 일을 개인이 실천한 것이다.

서울 언론들도 주목했다. 동아일보가 1967년 1월 5일자에 멜라콩 다리와 박길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경향신문 주최 ‘제3회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1968년) 추천 인물 2000명 가운데 3차 심사를 거친 69명 중 1명으로 뽑혔다

다리 건설 이듬해인 1965년 3월 31일 사채 4만 원과 기부금 1만2000원으로 ‘멜라콩 무료화물보관소’를 만들었다. 두 번째 ‘일년일선’이었다. 당시 역을 오가던 이들은 보따리며 짐꾸러미들을 보관할 데가 없었다. 박길수를 이를 또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대안을 만들고 실천했다.

불편하고, 돈 없고, 힘들고 고된 사람들을 늘 먼저 생각하던 박길수의 세 번째 ‘일년일선’ 목표는 무료 숙박소였다. 섬사람들은 태풍이 불면 돌아가지 못했다. 목포에 오후에 도착해 이튿날 새벽 서울로 가려던 섬사람들도 많았다. 박승은 “신안 분들이 많이 오갔다. 돈 여유가 있는 분들은 여인숙에서 자고, 없는 분들은 대기실에서 잤다. 박 선생이 그걸 보고 또 안타까워하셨다. 당시 철도를 관리하던 교통부에 민원을 넣어 철도부지 30평을 확보하고, 또 모금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3층짜리 무료 숙박소는 다리나 보관소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1968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그는 1966년 사업으로 계획한 80명 수용 규모, 총공사비 128만원의 무료숙박소 건립이 제대로 되지 않자 서울로 간다. 50만원의 사재와 기부금을 18만5000원을 빼면, 78만원을 더 모아야 했다. 호남 출신 국회의원 등을 찾아다니며 숙박소 건립을 호소했다. ‘무료숙박소 설비에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을 바란다’고 적은 호소문을 가슴에 달고 다녔다.

틈날 때마다 전국 스물다섯 곳 도시를 돌며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1970년 숙박소를 완공한다. 총 들어간 돈은 300만원 가량이다.

그다음 일년일선으로 보육원을 지으려고 했다. 박길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좋아하고, 잘 챙겼다고 한다. 박승은 “보해양조 양조장 부근에 살던 친구 옆집에 박 선생이 살았다. 우리를 볼 때마다 국화빵이나 매점 간식을 사주곤 했다. 우리도 ‘아저씨, 아저씨’ 하며 많이 따랐다. 그 인연으로 다리 만들기도 하고, 모금도 같이했다”고 전했다.

낮이면 역 주변에서 구두를 닦거나 껌을 팔고, 밤이면 역 대기실에서 추위에 떨며 토막잠을 자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보육원을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목포시사’는 이렇게 적었다. “목포역의 보안관을 자처한 멜라콩. 평소 그는 역사를 배회하는 떠돌이 소년들이 깡패들에게 구타를 당하면 이들을 데려다 치료해 주고,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나온 섬 처녀들이 인신매매단에 붙잡히면 필사적으로 구출해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보육원은 예산 문제로 이루진 못했다. 박길수는 대신 보육원이나 양로원 등지를 틈만 나면 찾아가 사람들과 함께했다고 한다.

1986년 7월 화물을 나르다가 다리를 다친다. 이후 목포역 소화물 취급소 노조원들 배려로 화물포장 같은 가벼운 일을 맡게 된다.

박길수는 교통부 소속 공무원으로 정식 퇴직한 후 부인과 함께 노년을 보낸다. 박승은 “부인도 훌륭한 인품에 다른 이들 돕기를 좋아했다”고 전했다. 박길수는 1994년 4월 15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박길수는 1989년 1월 7일 ‘멜라콩을 아시나요’라는 KBS 드라마 끝부분에 등장한다. 아래 사진은 목포역 담벼락 멜라콩 다리 표지석을 둘러보는 모습. KBS는 지난해 이 드라마를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KBS옛날티비 화면 갈무리

박길수 이야기는 1989년 1월 7일 ‘멜라콩을 아시나요’라는 KBS 드라마로도 나온다. 드라마 끝부분에 멜라콩 다리를 찾아간 61세의 박길수가 등장한다. 드라마 ‘무풍지대’의 ‘시라소니‘ 역으로 유명한 배우 박건식이 박길수 역을 맡았다.

늘 사람을 지켜보고, 돌보던 이였다. 돈보다 사람을 우선하던 사람이었다. 박승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진 않았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평생 앞장섰다. 이 시대 가진 자들이 가진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앞선 시장들이 목포 향토 문화에 관심이 없었다. 새 시장이 나오면 추모비라도 세우자고 강력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했다. <목포목포목포> 저자 손영득도 “‘멜라콩 다리’는 목포의 소중한 역사적 현장인데도, 기념 안내판 하나 없다. 엽기적이고 몰상식한 행태다. 어서 빨리 보전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목포문화원 사무국장 조상현은 기자와 통화하며 “박 선생은 선한 영향력과 자원봉사의 표상이자 선구자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룬 일은 공공의 것이라는 점에서, 또 60년 전 실천이라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했다. “멜라콩 다리만 해도 철길 인명 사고를 방지했다. ‘일년일선’의 결과물들은 숭고한 면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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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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