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드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살릴 수 없었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2026. 4. 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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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베니스영화제 상영작…“제발 데리러 와주세요” 6세 소녀의 전화
스크린에 담긴 전쟁의 참상…실제 음성 활용해 가자지구의 현실 고발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모든 것이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2024년 1월29일,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텔알하와 지역에 대피 명령을 내린 날, 적신월사(이슬람권 적십자사) 직원들은 여섯 살 힌드의 구조 전화를 받는다. "저에게 총을 쏘고 있어요. 제발 데리러 와주세요." 전화기 너머 아이의 음성이 간절하다. 구조대와 아이 사이는 차로 단 8분 거리. 그러나 이날의 구조 작전은 5시간 이상 이어진다.

《힌드의 목소리》는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브래드 피트, 와킨 피닉스 등 할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인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공개적 지지에 나선 화제작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팔레스타인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영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맹렬히 부수며 나아간다. 한때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려는 이 영화의 방식은 사건의 도발적 재현 그 이상이 되고자 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포스터 ⓒ찬란/(주)더콘텐츠온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절차라는 아이러니

힌드와 통화가 닿은 이후부터 적신월사 활동가들의 움직임은 다급해진다. 오마르(모타즈 말히즈)와 라나(사자 킬라니)가 번갈아 수화기를 드는 사이, 현장으로 구급차를 보내기 위한 구조 작전도 동시 진행된다. 차 안에서 이미 죽은 사촌들의 시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힌드가 무서워할 것을 알기에, 라나는 그들이 잠든 것이라는 말로 안심시키려 한다. 그때 힌드가 또렷이 답한다. "다 죽었어요." 방금 전 학교에서 몇 반인지 물었을 때 '나비반'이라고 대신 답한 유치원생. 분쟁 지역의 아이들은 삶보다 죽음을 먼저 배운다.

현장으로 구급차를 보내기 위해서는 '조정'이라는 행정 절차가 필요하다. 오마르는 원칙을 앞세우는 상사 마흐디(아메르 흐헬)의 입장에 분노하지만, 실은 마흐디가 지키려는 그 절차에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과 구조대원 양쪽의 목숨이 모두 걸려 있다. 이스라엘이 점령 후 공격을 진행 중인 상황, 적신월사는 이스라엘 국방부 산하 기구(COGAT)에 중재를 먼저 요청해야 한다. 민간인 구조를 위한 허가를 얻고 안전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조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구조대원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적신월사 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은 동료를 잃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가 울리는 마흐디의 책상 너머로는 구조 작업 중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사진이 보인다. 차 안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가 아닌 적신월사 상담원들의 관점으로 치환한 선택은 영화의 최선이다. 그렇게 《힌드의 목소리》는 단지 비극적인 사건의 재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쟁 지역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확장된다. 죽는 사람, 죽이는 사람, 살리려는 사람. 분쟁 지역엔 그 모두가 있다.

그중 실제 힌드의 음성을 활용한 연출은 관객에게 윤리적 딜레마를 안기는 논쟁적이고 대담한 방식이다. 파일명 'RECORDING_FILE_240129.WAV'로 기록된 힌드의 통화 음성은 스크린에 파동 그래프로 나타난다. 즉 배우들은 힌드를 대신한 어린이 배우의 음성이 아니라 적신월사 통화 기록에 남은 실제 힌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연기했다. 그것은 끝내 구하지 못한 존재의 음성이기도 하다. 배우들이 감정이 격앙되어 연기를 멈추는 일부 순간은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힌드의 음성 파일을 사용한 사전 리허설을 진행하지 않은 채 촬영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해당 장면에는 실제 통화를 나눴던 상담원의 음성이 대신 들리거나 당시 적신월사의 현장 영상을 보여주는 스마트폰 화면이 등장한다. 튀니지 출신 여성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카메라는 영화인 동시에 현실을 비추는 분명한 실체가 되고자 한다.

영화 《힌드의 목소리》 스틸컷 ⓒ찬란/(주)더콘텐츠온
영화 《힌드의 목소리》 스틸컷 ⓒ찬란/(주)더콘텐츠온
영화 《힌드의 목소리》 스틸컷 ⓒ찬란/(주)더콘텐츠온

여전히 구해낼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다

아이가 죽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며 느낄 관객의 무력감은 한때 벤 하니야 감독의 것이기도 했다. 가자지구 관련 뉴스를 접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목격하면서 감독은 방관을 넘어 그 일에 공모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곤 힌드의 실제 음성을 사용해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에게 감독은 되묻는다. "지금은 안 된다고 말하면 언제 가능한가? 10년 후에 이 영화를 보고 과연 그때도 내가 이 영화를 지금 만든 것이 잘못이었는지 알려달라."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어떤 사안을 다루는 것이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는 동안에도 분쟁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어간다. 언젠가는 이런 논쟁 자체가 모두의 관심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첨예하고 생생한 논제일 수 있을 때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미는 《힌드의 목소리》의 방식이 어떻게 적절하지 않다고만 할 수 있을까. 2023년 이후 가자지구에서 올해 3월 중순까지 7만 명 넘는 주민이 사망했다. 부상자까지 합친다면 20만 명을 훌쩍 넘는다. 그중 최소 3분의 1은 어린아이다. 이 숫자는 구체성과 개별성을 지운다. 사실의 전달일 뿐 비극을 나와 연결 짓게 하지 못한다.

《힌드의 목소리》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맹점 역시 지적한다. 전 세계의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와중에 우리의 뇌는 무감각해진다. 조정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적신월사 봉사자들은 소셜미디어에 힌드의 목소리와 사진을 올리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사람들의 인정에 호소해 구조 허가의 절차를 앞당기자는 것이다.

그러나 마흐디는 냉소적이다. 이미 소셜미디어에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이들의 사진이 널려 있다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분쟁 지역의 소식은 스크롤 한 번에 광고성 게시물에 묻혀버린다. 온전한 기억과 공감, 애도는 그곳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힌드의 목소리》는 관객을 극장에 앉히고, 폭력의 목격자가 되고,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이것이 나와 깊숙이 연결된 일임을 깨달을 때 무언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호소이기도 하다. 날로 오르내리는 유가와 주식 창의 그래프 숫자들이 가리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냉철한 외침이다.

《힌드의 목소리》는 지난해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1회 도하영화제의 개막작이었다. 영화제 측은 이스라엘과의 장기간 협상 이후 가자지구에서 탈출한 힌드의 어머니 위삼 하마다와 영화에 배역으로 등장한 적신월사의 실제 봉사자들까지 초청했고, 이는 모두가 함께 모인 최초의 자리였다. "저는 전쟁의 한복판, 어둠 속에서 살아가며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했습니다. 자라기도 전에 꿈을 빼앗긴 가자지구 아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영 전 무대에 오른 위삼 하마다의 말이다. 이 연설과 《힌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구해낼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말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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