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화폐 이야기] 47. 세계 유통주화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강승구 2026. 4. 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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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주화 수요 급감…조폐 산업, 예술·투자 시장으로 이동
유럽·북미도 같은 흐름…기념주화로 수익 모델 다변화
올해 1월말에 개최되었던 ‘세계화폐박람회(WMF)’에 참석한 관람객들이 각국의 다양한 기념주화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조폐공사 제공]


동전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행은 유통주화, 즉 일상에서 거스름돈으로 쓰이던 동전을 사실상 발행하지 않았다. 동전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동전을 만들어온 국가기관인 조폐공사에게는 생존의 문제를 던지는 동시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도전이기도 하다.

유통주화의 위기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디지털 결제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를 막론하고 유통주화에 대한 수요는 빠르게 줄고 있다. 다만 한국은 그 속도가 유독 빠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 보급률과 촘촘한 핀테크 인프라가 결제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으면서, 동전이 설 자리도 함께 좁아졌다.

그렇다면 세계의 조폐기관들은 이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위기를 새로운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올해 1월 말,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화폐박람회(World Money Fair, WMF)가 열렸다. 1974년부터 매년 개최되어 온 이 행사에는 올해도 전 세계 45개국, 300여 개 기관과 업체, 1만5000여 명이 참여했다. 박람회장에는 역사적 희귀 주화부터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활용한 기념주화, 수집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결합한 예술형 주화(Bullion Coin)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관람과 구매를 위한 방문객들의 줄이 행사 기간 내내 이어지며, 주화 산업에 대한 세계인의 뜨거운 관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해 발행되었던 경주 APEC정상회의 기념주화 [조폐공사 제공]


한국조폐공사도 현지를 직접 찾아 글로벌 주화 시장의 최신 흐름을 확인했다. 현장에서 목격한 풍경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동전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세계는 오히려 주화를 더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세계 각국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예술형 주화(Bullion Coin)’다.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제작되며, 투자 가치와 수집 가치를 동시에 지닌 이 주화는 일상의 거스름돈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의 독수리, 캐나다의 단풍잎, 중국의 판다처럼 각국의 상징을 담아낸 예술형 주화는 단순한 금속 조각이 아니다. 그 나라의 정체성과 문화를 전 세계 수집가들에게 전달하는 살아있는 매개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랑스 조폐국(Monnaie de Paris)의 행보다. 864년에 설립되어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기관은 올해 처음으로 예술형 주화를 정식 발행할 계획이다. 최근 제한적 시범 판매를 거쳐, 6월부터는 99.9% 순도의 금화 4종을 수량 제한 없이 판매한다는 구상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실물 주화와 함께 디지털 형태의 ‘E-불리온’을 병행 판매한다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소유권 증서를 먼저 발급받고, 원하는 시점에 수수료를 내어 실물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고가 금화를 직접 보관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낸 혁신적인 접근이다.

프랑스 조폐국은 예술형 주화 발행의 의미를 단순한 투자 수단이 아닌, 역사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손익분기점을 2~3년 후로 내다보고 올해를 예술형 주화 발행 원년의 해로 설정해 마케팅과 홍보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전략이다.

박람회에서 만난 해외 조폐기관 관계자들과 글로벌 유통사들은 입을 모아 한 가지 사실을 강조했다.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K-POP과 K-MOVIE, K-DRAMA로 대표되는 한류가 세계인의 일상 깊숙이 파고든 지금, 한국 고유의 정서와 상징을 담은 예술형 주화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고 했다.

올해가 한-불 수교 140주년이라는 점도 하나의 기회다. 프랑스 조폐국은 양국의 유네스코 유산을 하나씩 담아 공동 주화를 발행하는 방안을 먼저 제안해 왔다. 협업에 대한 프랑스 측의 관심은 구체적이고 진지했다.

동전이 사라지는 시대는 조폐 산업의 종말이 아니라, 전환점이다. 거스름돈을 만들던 기술과 신뢰가, 이제는 한 나라의 이야기를 귀금속 위에 새기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세계 시장은 이미 그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전 세계 조폐기관들이 유통주화 대신 자국의 역사와 예술성을 담은 기념주화로 새로운 시장을 열어가는 지금, 한국조폐공사가 나아가야 할 길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우진구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장


강승구 기자 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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