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AI" 전화 끊은 그 순간, 회사는 웃는다...짜증이 돈 된다는데
[편집자주] 트럼프 2기 출범, AI의 발달, 기후변화 등 글로벌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졌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전, 깊이 있는 시각과 예리한 분석으로 불확실성 커진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를 전달합니다.

이런 불편은 단순한 우연이나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기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수익 구조일 수 있다는 분석이 미국에서 나왔다.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닐 마호니 교수(전미경제연구소 연구원)와 미국 진보성향 싱크탱크 그라운드워크 콜래보레이티브의 채드 메이젤 정책연구원은 지난 2월 '짜증 경제(Annoyance Economy)에 맞서 싸우다'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기업이 소비자의 불편과 마찰을 전략적으로 설계해 수익을 늘리거나 비용을 줄이는 새로운 가치 추출 방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미국 가계 부담액은 연간 1650억 달러(약 245조원)수준이라고 추산했다.

앞선 2023년 12월, 마호니 교수는 같은 대학 리란 에이나브 교수와 '구독판매' 연구 논문도 발표했는데, 소비자 부주의와 관성이 구독 비즈니스의 핵심 수익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놨다.
연구에 따르면 신용카드 재발급 등으로 소비자가 결제 정보를 직접 갱신해야 하는 시기에는 평소보다 구독 유지율이 4배 가량 급락한다. 이를 바탕으로 10개의 구독서비스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설계해 분석했는데, 해지 절차에 의도적인 마찰을 넣어 소비자의 '부주의(Inattention)'를 유도할 경우 기업 수익은 서비스에 따라 최소 14%에서 최대 230%까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입장에서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고객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가두는(Trapping)' 전략이 훨씬 높은 투자 수익률(ROI)을 보장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둘째는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비대칭이다. 디지털 기술은 원래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가입은 쉽고 해지는 어렵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돼 왔다. 가입 버튼은 눈에 띄게 배치되지만, 해지 경로는 여러 메뉴 아래 숨겨진다. 여기에 '다크 패턴'이 결합하면 소비자의 선택은 더 크게 왜곡될 수 있다. 초기 가격은 저렴해 보이지만 결제 막판에 수수료나 배송료가 따로 붙고, 원치 않는 옵션은 미리 선택돼 있다. 해지 단계에서는 본인 인증, 설문조사, 복수 확인 절차가 이어진다. 불친절을 넘어, 소비자가 지치고 포기하도록 설계된 구조인 셈이다.
셋째는 비용 절감의 외주화다. 기업들은 고객센터 인력을 줄이고 자동응답 시스템, 셀프서비스, AI 챗봇을 확대하며 운영비를 낮춘다. 그러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 좌절감은 소비자가 떠안는다. 효율의 과실은 기업이 챙기고, 처리 비용은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구조다.

같은 해 10월 연방거래위원회(FTC)는 '클릭 투 캔슬(Click-to-Cancel)' 규칙을 발표했다. 핵심은 가입만큼 해지도 쉬워야 한다는 원칙이다. 규칙은 부정확한 고지, 불충분한 동의, 복잡한 해지 절차를 금지하고, 소비자가 간단한 방식으로 반복 결제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FTC는 최근 5년간 관련 민원이 꾸준히 늘었고 2024년에는 하루 평균 약 70건의 불만이 접수됐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다만 이 규칙은 시행 직전 제동이 걸렸다. 미국 제 8 연방항소법원은 2025년 7월 해당 규칙을 무효화했다. 연간 1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영향이 예상되는 규칙임에도 FTC가 필요한 예비 규제 분석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연방 차원의 강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유지됐지만, 실제 제도화는 행정 절차의 문턱을 넘지 못한 셈이다.
FTC는 올해 1월 재추진에 나섰다. 네거티브 옵션(negative option) 규제와 관련한 추가 사전 검토 절차를 시작했고, 3월 12일부터는 재도입 가능성과 대안적 규제 수단, 비용·편익 분석에 대한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법원이 지적한 절차상 문제를 보완해 다시 제도화를 시도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거래와 구독 서비스가 빠르게 늘면서 소비자 불만은 표시 가격과 실제 결제 금액의 차이, 계약 변경 고지 미흡, 복잡한 해지 절차에 집중됐다. 특히 해지 버튼을 숨기거나 특정 기기에서만 해지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본인 인증과 설문, 재확인 절차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5년 2월 개정된 전자상거래법 시행을 계기로 소비자 불편을 유도하는 온라인 인터페이스(UI) 설계 자체를 감독 대상으로 편입했다. 숨은 갱신, 순차공개 가격책정, 특정 옵션 사전선택, 잘못된 계층구조, 취소·탈퇴 방해, 반복간섭 등 6개 유형의 다크 패턴이 규제 대상이 됐다. 가격 표시나 약관 문구뿐 아니라 소비자가 실제로 겪는 클릭 경로와 해지 절차 자체가 법 집행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규제 프레임은 2023년 공정위의 자율관리 가이드라인에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당시 공정위는 온라인 다크 패턴을 편취형, 오도형, 방해형, 압박형의 4개 범주와 19개 세부 유형으로 정리했다. 2025년 법 시행은 이 가운데 핵심 유형을 법적 규제 대상으로 격상한 조치다. 한국 역시 소비자 피해를 개별 분쟁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UI 설계와 거래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집행도 구체화되고 있다. 2025년 9월 공정위는 주요 온라인 플랫폼을 점검한 결과, 36개 사업자와 관련된 다크 패턴 의심사례 45건에 대해 시정 또는 시정계획을 제출받았다고 밝혔다.

짜증 경제의 문제는 이런 구조가 단기적으로는 실적 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지를 지연시키면 매출은 늘고, 고객 응대를 자동화하면 비용은 줄어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브랜드 신뢰와 고객 만족도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소비자는 총액 표시를 의심하게 되고, 계약 조건을 그대로 신뢰하지 않게 되며, 플랫폼과 공공 서비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 역시 낮아질 수 있다. OECD가 지적한 것처럼 슬러지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시장과 제도 전반의 신뢰를 훼손하는 구조적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해법 역시 가격 규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정책 논의의 초점은 가격 자체보다 마찰의 설계와 강도에 맞춰지고 있다. 슬러지 감사는 소비자 여정을 단계별로 추적해 클릭 수, 대기 시간, 포기율, 추가 인증, 정보 탐색 부담 등을 시간 비용으로 환산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고령층이나 저소득층처럼 특정 집단이 더 큰 부담을 겪는지까지 평가하는 포용성 기준이 더해진다. 소비자 보호의 기준이 가격표와 환불 규정에서 절차, 시간, 경험 설계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자 측 대응 수단으로는 AI 에이전트의 부상이 거론된다. 에이전틱 커머스 환경에서는 개인의 AI 비서가 기업의 해지 방해, 숨은 수수료, 불리한 옵션 설정 등을 사전에 탐지하고 우회하는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은행 명세서를 분석해 잊힌 구독을 자동 해지하거나, 콜센터 대기를 대신 수행하고, 정크 수수료를 식별해 더 낮은 가격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기업이 자동화로 소비자 마찰을 확대해 왔다면, 소비자 역시 자동화된 방어 수단을 갖게 되는 셈이다.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기업은 단기 수익을 위해 소비자 피로를 활용하는 곳이 아니라,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신뢰를 축적하는 곳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술이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발전해 왔다면, 향후 규제와 혁신의 기준도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거래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짜증 경제의 종말은 결국 소비자의 시간을 비용으로 인정하고, 그 비용을 방치하지 않는 제도와 기술이 함께 작동할 때 가능하다는 평가다.
김하늬 기자 hone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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