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오래된 미래, 네이버 인조이재팬 [EDITOR's LETTER]

이홍표 2026. 4. 1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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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X가 자사의 AI 그록(Grok)을 활용한 자동 번역 기능을 도입했습니다. 이제 게시물이 올라오는 순간 유저는 자기 나라말로 전 세계의 실시간 트렌드와 긴박한 소식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며, 한국과 일본 네티즌들이 열었던 24년 전의 뜨거운 기억을 떠올립니다. 바로 2002년 네이버가 선보였던 ‘인조이재팬(Enjoy Japan)’이라는 오래된 미래입니다.

인조이재팬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말이 통하면 마음도 통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네이버가 제공한 실시간 기계 번역은 양국 네티즌을 한 울타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장벽이 사라진 자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포옹이 아닌 난투였습니다.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고, 인조이재팬은 매일 밤 키보드 전쟁이 벌어지는 배틀 그라운드가 됐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장은 역사였습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은 양국 네티즌이 수백 년치 고지도와 역사 문서를 번갈아 들이밀며 밤새 싸우는 전쟁터가 됐습니다. 위안부 문제에서는 강제성 여부를 놓고 한국 측이 피해자 증언을 제시하면, 일본 측이 당시 미군 심문 보고서를 반박 자료로 내놓는 식의 치열한 사료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양국이 서로 다르게 배운 역사의 간극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치열한 싸움은 양국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양국 네티즌은 스스로 도서관을 뒤져 사료를 찾고 논리를 단련했습니다. 미워하기 위해 공부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가 무엇에 아파하고 무엇에 열광하는지를 그 어떤 외교 문서보다 생생하게 체득했습니다.

또 상대의 약점을 찾으려 눈을 부라리다 역설적으로 상대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국 네티즌들은 일본 특유의 ‘기록 집착적’ 문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 네티즌들이 논쟁 중에 들이밀던 정교한 데이터 정리 방식과 “소스(Source)는 있느냐”며 근거를 압박하던 습관은 당시 감정적 호소에 치우쳤던 한국 커뮤니티에 ‘팩트(Fact) 중심 토론’이라는 새로운 문법을 이식했습니다. 일본 네티즌들은 한국 특유의 ‘역동적인 에너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사회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와 ‘다테마에(겉치레)’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거침없는 직설 화법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가공할 속도로 정보를 전파하는 한국의 디지털 응집력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상호 침투는 정서적 동기화로 진행됐습니다. 좌절을 의미하는 ‘OTL’이 예입니다. 게시판의 일본 네티즌들은 수세에 몰리면 사람이 바닥을 짚고 쓰러진 모습을 본떠 특수문자 ○| ̄|_을 썼습니다. 그러자 한국 네티즌들이 이를 영어 OTL로 바꿔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일본 네티즌들도 그 편의성을 받아들여 OTL로 바꿔 쓰기 시작했죠. 이 표현은 훗날 영미권에서도 orz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찾으려 눈을 부라리다 역설적으로 서로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인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조이재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서비스 종료를 앞둔 2009년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서로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자국의 자존심을 걸고 자료의 산을 쌓으며 치열하게 맞붙던 게시판에선 폐쇄 소식이 들리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게시판은 돌연 거대한 고백의 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동안 죽을 만큼 미워하며 치열하게 싸웠지만 사실 내 인생에서 너희만큼 나를 공부하게 만든 스승은 없었다”, “내일부터는 누구와 이 뜨거운 밤을 보내야 하느냐”는 절절한 작별 인사가 번역기를 타고 흘러넘쳤습니다. 번역기로 “너희가 있어서 즐거웠다(楽しかった)”는 문장을 올리며 아쉬워하던 그들은 서비스가 완전히 꺼지는 그 순간까지 “잘 살아라, 건강해라”라는 응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혐오의 용광로였던 그곳이 폐쇄라는 운명 앞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존중과 연대라는 가치를 정제해낸 것입니다.

X에선 지금 전 세계적 설전이 폭발했습니다. 미국, 한국, 일본, 러시아, 브라질, 튀르키예, 심지어 이란까지 세계적으로 말발 좀 있는 모든 네티즌들이 이 판에 뛰어들었습니다. X가 다시 열어젖힌 이 오래된 미래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술이 장벽을 허문 자리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인조이재팬의 마지막 밤이 증명하듯 투박한 난투 뒤에 남는 진실은 결국 상대에 대한 깊은 인정이 아닐까 합니다. 기술이 준 이 새 장소가 단순한 드잡이질의 판이 아닌 성숙한 이해의 장이 된다면, X는 인조이재팬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진정한 ‘인간들의 성지’로 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면 한국도 참 대단합니다. 네이버 인조이재팬의 사례처럼 한국은 페이스북보다 앞섰던 싸이월드, 유튜브보다 앞섰던 아프리카TV 등 빅테크로 거듭난 곳보다 더 앞선 창의적 서비스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 어딘가에도 분명 세계를 휩쓸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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