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1600만 대기록 불편한 진실…‘스크린 몰빵’ 흥행의 공식이 됐다 [세상&플러스]

정주원 2026. 4. 18.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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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만 흥행작 나왔지만 여전히 한산한 영화관
일부 작품에 쏠림·티켓 부담에 관객은 OTT로
스크린 독점에 관객 증가가 아닌 집중 심화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메가박스의 모습. 관객이 없이 썰렁하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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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정주원 기자] 지난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 메가박스 매표소 앞은 한산했다. 평일 오전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흥행작이 있다’는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한쪽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일반 영화관이 아닌 아이돌 가상현실(VR) 콘텐츠 상영관이다. 아이돌 그룹 투어스(TWS)가 출연하는 ‘투어스 VR 콘서트’를 보기 위해 20여 명의 관객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인 티켓 판매기에 표시되는 인기 순위에서도 아이돌 콘텐츠는 4위에 올랐다. 개봉 두 달이 넘은 ‘왕과 사는 남자’도 여전히 5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영관 배치 역시 특정 작품에 집중돼 있었다. 이날 기준 ▷‘프로젝트 헤일메리’ 7개 관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 3개 관 ▷‘살목지’ 4개 관이 주요 상영관을 나눠 가졌다. 다른 영화들은 하루 1~2회 상영에 그쳤다.

영화업계 관계자는 “요즘은 관객들이 영화관에 와서 고르기보다 보고 싶은 영화를 정해서 온다”며 “흥행작이 없으면 관객 자체가 크게 줄어드는 구조”라고 말했다.

관객은 왜 떠났나 “가격 부담에 OTT로 이동”

관객들의 영화 콘텐츠 소비의 주무대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옮겨갔다는 건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동작구 사당동에 사는 김성철(26) 씨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요즘은 한 달에 한두 편 정도만 본다”며 “오늘도 일부러 영화 보러 온 게 아니라 코엑스에 들렀다가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관에서만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면 OTT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10일 코엑스 메가박스 상영 영화들이 인기순으로 나열된 모습. 정주원 기자

마포구 염리동에 사는 박유나(19) 씨는 아예 영화 대신 아이돌 콘텐츠를 선택했다. 그는 “VR 콘서트는 여기서만 볼 수 있어서 왔다”며 “영화는 가격이 부담돼 자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는 나중에 OTT로도 볼 수 있지만 이런 콘텐츠는 현장에서만 즐길 수 있다”며 “가격 대비 경험을 따지면 이쪽을 선택하게 된다”고 했다.

강남구 역삼동에 거주하는 50대 직장인 장모 씨는 “예전에는 주말마다 극장을 찾았지만 지금은 반년 넘게 안 온 적도 있다”며 “OTT가 워낙 다양하고 편하다 보니 극장까지 갈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 조사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영화인연대·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지난 2월 관람객 63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67.7%가 ‘티켓 가격 부담’을 영화관 관람 감소 이유로 꼽았다. ‘OTT 등이 더 편하다’는 응답도 48.1%에 달했고,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특정 영화만 상영된다’는 답변도 41.7%로 나타났다.

특히 응답자 66.9%는 “비용 부담 때문에 OTT 공개를 기다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관객 3명 중 2명이 사실상 극장을 선택지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의미다.

‘투어스 VR 콘서트’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입장 전 줄을 서는 모습. 정주원 기자

가격 체감은 더 뚜렷하다. 응답자의 95.6%가 현재 영화 티켓 가격이 비싸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적정 가격은 ‘1만원 미만’이 다수였다.

이날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러 온 김성철 씨는 “영화사·통신사 할인 쿠폰이 없으면 영화를 선뜻 보지 못하게 된다. 현재 가격에서 4000~5000원 정도 할인이 들어가야 적정하다고 생각한다”며 “넷플릭스·왓챠를 동시에 구독하는데 거기에 더해 영화비용까지 따로 내려면 부담스럽다”고 설명했다.

주요 OTT 월 구독료는 6500원에서 1만3000원 수준으로 영화 한 편 값보다 저렴하다. 특히 2~4인 단위로 극장을 찾고 팝콘 등 부대비용까지 더하면 체감 부담은 훨씬 커진다.

1600만 영화의 역설…흥행은 계속되나 극장은 비어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본 관객은 1억609만명. 2019년(약 2억2600만명)의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 꾸준히 상영관을 찾아주는 관객마저 특정 영화를 찾는다. 상영작의 다양성은 실종된다.

이날 코엑스 메가박스에서도 이 같은 흐름은 그대로 확인됐다. 개봉한 지 두 달이 넘은 ‘왕사남’은 여전히 상영관을 유지하며 관객이 꾸준히 찾고 있었고, ‘프로젝트 헤일메리’ 등 일부 작품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이날 왕과 사는 남자를 보러 온 50대 직장인 장모 씨는 “늦었지만 왕사남은 꼭 보려고 시간 내서 올해 처음으로 영화관에 왔다. 다른 작품은 크게 보고 싶은 게 없었다”고 했다.

장기 상영을 이어가는 ‘왕사남’은 관객 수 16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흥행 성적을 다시 썼다. 문화 소비자들이 영화관을 외면하는 환경에서도 흥행작이 나온 건, 그만큼 우리 영화 시장이 극히 일부만 살아남는 생태계로 전환됐단 분석이다.

영화관 관계자는 “흥행작은 종영을 쉽게 못 한다. 지금도 왕사남을 찾는 관객이 계속 있어서 최소 3~4개 관은 유지하고 있다”며 “결국 몇 개 작품 위주로 움직이는 구조”라고 말했다.

10일 오전 영화관을 찾은 관객이 영화 예매를 위해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있다. 정주원 기자
“스크린 몰아주기 구조…관객 증가 아닌 집중”

과거 1000만 영화들은 많아야 300~700개 수준의 상영관에서 출발해 긴 상영 기간 동안 입소문으로 관객을 끌어모았다.

실제 ‘왕의 남자’(2005년 개봉)는 최대 313개의 스크린으로 67일에 걸쳐 10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괴물’(2006년)은 최대 스크린 수 647개로 33일 만에 1000만 관객 달성에 성공했다. ‘해운대’(2009년)는 최대 764개의 스크린을 확보하며 1000만 영화 반열에 올랐다.

반면 최근 흥행작들은 확보한 상영관 숫자부터 다르다. ▷서울의 봄(2023년) 2463개 ▷파묘(2024년) 2355개 ▷범죄도시4(2024년) 2980개 등이다. ‘왕사남’ 역시 최대 2170개 스크린에서 상영되며 한 달 만에 관객 수 1000만을 넘겼다. 최대 스크린 수만 놓고 보면 20년 전 대비 3~5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좌석 규모 역시 과거보다 크게 확대되면서 개봉 초기에 관객을 한꺼번에 흡수하는 구조가 일반화됐다.

영화관 관객이 줄다 보니 스낵바 코너도 한산한 모습. 정주원 기자

전문가들은 이런 구조가 “관객 증가가 아니라 관객 집중”을 만들어낸다고 입을 모은다. 스크린을 선점한 영화는 더 빠르게 흥행하고 그렇지 못한 영화는 관객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양극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병인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장은 “예전에는 200~600개 관 정도에서도 충분히 1000만 영화가 나왔다”며 “지금처럼 1000~2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한 번에 잡는 방식은 입소문 이전에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같은 구조에서는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몇 개 작품을 소비하게 된다”며 “결국 다양한 영화가 설 자리가 사라지고 흥행도 작품성이 아니라 배급 규모에 좌우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지금 극장은 특정 흥행작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축소됐다”며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사람만 찾는 공간이 되면서 영화관 자체의 기능이 약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지금처럼 특정 영화에 스크린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상영 기회 자체가 줄어들고 결국 관객 선택권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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