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산림치유 일지] 차경을 넘어 여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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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참맛을 엉뚱한 데에서 경험했다.
4월 초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하지만 가이드를 맡은 친구가 욕심을 부린 탓인지 '여행한다는 느낌'은 아쉽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6년 전 코로나19 사태로 전국이 숨죽일 때 이 친구들과 가파도에 함께 여행한 추억이 소환되자, 40년 묵은 각자의 사연들이 천일야화처럼 풀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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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참맛을 엉뚱한 데에서 경험했다. 4월 초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제주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가 속속들이 이곳저곳을 안내해 준 덕분에 제주의 깊숙한 속살을 보았다. 하지만 가이드를 맡은 친구가 욕심을 부린 탓인지 '여행한다는 느낌'은 아쉽게도 들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사진 맛집'의 풍경들이 채워졌으나, 마음의 빈자리는 여전했다.
정작 여행의 참맛은 이동하는 차 속에 있었다. 최백호 형님의 숨겨진 노래 '가파도'를 변주하고 가사를 비틀어 부르는 친구의 너스레에 모두가 배를 잡았다. 그리고 6년 전 코로나19 사태로 전국이 숨죽일 때 이 친구들과 가파도에 함께 여행한 추억이 소환되자, 40년 묵은 각자의 사연들이 천일야화처럼 풀려나왔다. 보고 싶은 몇몇 친구에게는 기어이 전화를 걸게 할 만큼 함께한 친구 모두가 만족한 시간이었다.
문틈으로 먼 산의 멋진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은 우리 선비들의 꿈이었다. 자연을 가지려 하지 않고, 잠시 빌려서 즐긴다는 안빈낙도의 정서가 담긴 자연관이다. 이런 자연관은 중국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송대 시인 소동파는 '여산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며 중국 최고의 명산 '여산'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산속에서는 보지 못하니 멀리서 보라고 말한다.
멀리서 자연을 바라보는 관조는 우리의 삶 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 삶 속에서 만들어진 철학보다는 관념적인 사상의 기반이 된 거다. 물론 봉화 청량산을 지독하게 사랑한 퇴계 이황과 같은 유학자도 있지만, 대부분 멀리서 산을 관조하는 삶을 소중히 여겼다.
나는 우리의 '차경'이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론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킨 아쉬움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서구의 철학자들은 숲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니체, 소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걸으며 사유했다. 그들의 철학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했던 것은 대지와의 직접적인 접촉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차경'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카페의 통창을 통해 주변 자연을 즐기는 문화나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 이곳저곳을 다니는 관광 역시 차경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멋진 자연 경관이 있는 곳곳마다 대형 카페가 즐비한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차경의 전통을 따라 편안하고 안전하게 즐기려는 소비자의 욕구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국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는 올레길과 둘레길을 걷거나 황리단길 같은 지역의 전통 길을 걸으며 도시의 속살을 체험하며 여행의 묘미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여행을 '바라보는 것'으로만 정의하곤 한다.
최근 청도의 한 카페에서 뇌졸중으로 언어능력을 상실한 아버지와 딸의 여행을 흥미롭게 보았다. 40대의 딸은 카페지기에게 "꽃과 나물 채취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위해 카페에 있는 두릅을 따게 해줄 수 없느냐?"라고 부탁했다. 함께 두릅을 한가득 딴 부녀는 아버지의 추억이 서려 있는 청도 풍각면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두릅 채취와 장보기를 통해 아버지의 과거와 소통하고, 젊은 시절의 추억을 일깨워주기 위한 부녀의 여행이 남달라 보였다.
카페에 앉아 바깥의 봄 풍경을 '빌려보고' 있던 나에게 그 부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여행은 멀리서 관조하는 차경을 넘어, 풍경의 살결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자신의 삶을 조우하고 서로를 나누는 것임을 말이다. 유난히 화려한 올봄이 그래서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김태일 Story 산림치유연구소장·산림치유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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