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차 산모의 비극… 낙태죄 폐지 이후 법 공백이 없었더라면
대체 법안 논의 밀려 공백 여전
"뒤처진 보건의료 현실을 보라"
"임신 중지, 국가에서 관리해야"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합니다.

"임신한 여성이 임신 유지 또는 종결에 관해 한 전인격적인 결정은 그 자체가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원칙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낸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 적힌 내용입니다. 헌재는 임신·출산이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여성은 안전하게 임신 중지를 결정할 권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라진 낙태죄를 대신해 임신 중지 의료 행위를 관리할 기준·체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결국 임신 중지를 결정할 상황에 놓인 국내 여성은 부정확한 정보로 인해 혼란을 겪거나 낯선 브로커에게 병원·약물 소개를 부탁하며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삼아야 합니다. 왜 현실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7년 동안 달라진 게 없다

헌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2년 안에 대체 법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어요. 21대 국회(2020~2024년) 때 관련 정부안을 포함해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각각 6건과 7건 발의됐지만 모두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22대 국회에서도 남인순·이수진·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모자보건법 개정안), 조배숙 국민의힘 의원(형법 및 모자보건법)이 대체 입법안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되지 못했어요. 즉 7년 동안 사실상 법·제도적 진전이 전혀 이뤄지지 못한 것이죠.
여성 단체에선 대체 법안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습니다. 2024년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는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경험 조사 결과 보고서'를 통해 대체 법안이 없는 상황에서의 임신 중지가 얼마나 위험하고 막막한지 전했는데요. 임신 중지 경험이 있는 여성 응답자의 답변 몇 개만 살펴 보겠습니다.
"임신 중지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문의하기 어려웠음. 병원에서 꼭 보호자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곤란했으나 지인을 섭외해 어찌저찌 넘김. 근데 진짜 데려올 사람이 없는,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유산 유도) 약물 복용 후 병원에 방문했지만 임신 중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추가 수술이 필요했음. 약물 임신 중지에 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음."
"의료인이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거나 차별적인 발언을 했음. 신뢰할 수 있는 의료인인지 확인할 수 없었음. 비용이 부담됐음. 약물 후유증 정보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음. 약물 복용 후 나타날 신체적 증상이 걱정됐지만 언제 병원을 가야 하는지, 가도 되는지 몰라 어려웠음. 약물 복용 후 신체적 증상 때문에 힘들었지만 도움을 구하거나 문의하기 어려웠음."
응답자들은 또 "임신 중지 상담, 지원, 병원 정보 등 절차가 공식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차원에서 전달돼야 한다"거나 "수술 가능 병원, 가격 등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임신 중지 의료 행위에 대한 투명한 관리의 필요성을 강조했죠.
입법 공백 탓... 살인자 된 산모

그럼에도 임신 중지에 관한 관리 공백이 방치된 끝에 기어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2024년 6월 36주 차 산모였던 권모씨가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고 브로커 소개로 임신 중지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방식이 제왕절개 후 태아 살해였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며 지난달 살인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것이죠. 법정에서 권씨는 "(수술을 통해) 아기가 사산된다고 들었을 뿐"이라며 살해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판부도 "(권씨를) 무작정 비난하기 어렵다"며 관련 법·제도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어요. 판결문 말미에는 "국가가 임신·출산·육아에 장애가 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적극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 사건과는 충분히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는 내용이 적혔습니다.
'낙태 갈등'은 소수의 사례일까

36주에 이르러 수술을 한 권씨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만큼 자칫 모든 임신 중지 자체가 극소수의 특수 사례라거나 경솔한 생명 경시 행위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헌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서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갈등 상황'의 예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학업·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에 대한 우려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경우 △자녀가 이미 있어서 더 이상의 자녀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 △상대 남성과 교제를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경우 △미혼의 미성년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등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여성계는 수많은 '낙태 갈등'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안전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가 시급하다고 외치고 있어요.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SHARE 대표는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7주년 집회에서 정부·국회를 향해 "책상 앞에 앉아서 임신 중지 여성 중 누굴 어떤 기준으로 처벌할지 따지지 말고 국제적 임신 중지 임상 가이드에서 한참 뒤처진 한국의 보건의료 현실을 보라"고 비판했습니다.
의료진도 구체적인 의료 체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보탰어요. 집회에 참석한 행동하는간호사회의 혜림씨는 "임신 중지에 건강보험을 전면 적용하고 공공 의료 체계 안에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안전한 유산 유도 약물을 하루빨리 도입하고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이 임신·출산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릴 권리는 언제쯤 보장될까요. 출산이 진정한 축복으로 여겨지는 사회를 맞이하려면, 정보가 부족해 수술 가능 주수를 놓쳤거나 단돈 수십만 원이 모자라단 이유로 원치 않는 출산을 하도록 내몰리는 현실부터 사라져야 할 겁니다.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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