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사실상 ‘지구당’ 부활

여야가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도당 하부 조직인 당원협의회·지역위원회 산하에 사무소 1곳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선거 제도 개편안에 합의했다. 정치권에선 “2004년 폐지된 지구당이 사실상 부활 수순을 밟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17일 오후 양당 원내운영수석부대표,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간사 간 ‘2+2 회동’을 열고 이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여야는 이어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위와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차례로 열고 법안 처리에 나섰다.
현재는 현역 국회의원만 의원 사무실을 당원협의회 사무실처럼 활용하고 있는데, 앞으론 선거에서 낙선한 정당도 지역 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치권은 이를 사실상 ‘지구당의 부활’로 받아들였다.
지구당은 2002년 불법 대선 정치자금 사건을 계기로 폐지됐다. 당시엔 원외 인사들도 현역 국회의원처럼 지구당 사무실을 설치해 직원을 두거나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지구당 운영비를 대기 위해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빈번했고, 이른바 ‘오세훈법’이 통과되면서 다른 ‘정치 개혁’ 내용과 함께 지구당 폐지가 이뤄졌다.
◇“지구당 부활땐 돈 정치 우려, 양당 체제 더 굳어질 수도”
이날 합의에 대해 여야는 “사무소 설치만 허용한 것이지 지구당 부활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과거에 비해 정치자금 부분이 투명해졌지만 지구당의 폐해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지구당 부활 논의는 여야 양당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낙선한 원외 인사들도 현역 의원들처럼 지역 사무소를 차려 지역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24년 9월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구당 부활에 합의하기도 했다. 지난해 민주당 당대표 선거 과정에서도 정청래 대표가 지구당 부활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번 합의에는 양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민주당은 국회의원 배출에 어려움을 겪는 대구·경북이나 부산·경남에 지역 사무소를 둠으로써 ‘동진(東進)’을 본격화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서울·수도권과 호남에서 같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에 대해 소수 정당들은 “지구당이 부활하면 양당 중심의 정치 체제가 고착화되고 ‘돈 정치’가 심화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서일준 국민의힘 정개특위 간사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당원협의회·지역위원회에 사무실을 못 두게 돼 있었는데 사무실만 두게 바꾼 것”이라면서 “지구당 부활은 아니다”라고 했다. ‘돈 정치’가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양당은 과거 지구당과 달리 후원금 모금 등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무소를 중심으로 지역 정치 세력화가 이뤄질 수 있다”면서 “불법 정치자금을 원천 차단할 방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이날 여야 합의안에는 광역의회 비례대표 비율을 현행 10%에서 14%로 상향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에 따라 이번 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의원 숫자는 2022년 지방선거(93명) 대비 27~28명이 늘어난 약 120명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16개 시도의회별로 평균 1.7명 정도 증가하는 것이다.
비례대표 비율 상향은 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등 범여권 야4당이 중대선거구제 확대와 함께 요구해 온 내용이다. 이들은 광역의회 비례대표 비율을 30%까지 상향해 소수 정당에도 광역의회 진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국민의힘 합의 과정에서 중대선거구제 확대는 행정 통합이 이뤄지는 광주광역시에만 일부 적용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비례대표 비율도 조정됐다.
이번 비례대표 비율 조정은 1995년 이후 31년 만에 이뤄졌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론화 절차 없이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 간 비공개 합의만으로 결정됐다. 정개특위 논의 과정에서 민주당은 15%, 국민의힘은 13%를 주장했고 양당은 중간인 14%로 합의했다. 협상 과정에서 국회 차원의 공청회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이번 비례대표 의원 수 증가로 매년 30억원가량의 비용이 소요될 전망이다. 2024년 기준 광역의원 의정비는 평균 6597만원이었다. 여기에 광역의원 2명당 1명씩 배정되는 정책지원관 인건비와 기타 운영 경비 등을 더하면 광역의원 1명당 매년 1억원 이상이 들어간다.
당초 비례대표 확대의 근거로 거론됐던 ‘소수정당의 의회 진입’ 효과도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수 교수는 “10%에서 14%로 비율 향상은 양당 기득권을 강화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면서 “호남에선 민주당이, 영남에선 국민의힘이 한 석씩 더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야 4당은 “거대 양당의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서왕진 조국혁신당 원내대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끝내 정치 개혁 대신 기득권 수호를 위한 밀실 야합을 택했다”면서 “검찰, 사법, 미디어 관련 개편 방안에 대해서는 극한 대치를 반복했던 두 당이 ‘정치 개혁’ 앞에만 서면 한 편이 된다”고 했다.
6·3 지방선거 선거구도 이날 획정됐다. 공직선거법상 선거구 획정 법정 시한인 지난해 12월 5일을 4개월 이상 넘긴 것이다. 앞서 선관위는 시·도 차원 조례 개정과 선거구 공고 등을 감안해 이날을 실무상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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