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손길이 남편을 꿈꾸게 하다
[이명옥의 아트&멘토]
몽환적 초현실주의 화가 샤갈
거장으로 밀어올린 아내 벨라
“그녀의 침묵도 그녀의 눈도 나의 것이다. 마치 그녀가 내 유년과 현재와 미래를 모두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이 자서전에 남긴 고백처럼 그에게는 영감의 원천이자 찬미의 대상, 삶과 예술을 완성시킨 존재가 있었다. 아내 벨라 로젠펠트(1895~1944)다. 샤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벨라라는 존재를 먼저 만나야 한다. 샤갈을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벨라의 자취를 따라가 보려 한다.
◇벽을 뛰어넘은 사랑

1909년 가을, 샤갈과 벨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샤갈은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벨라를 처음 보자마자 “이 사람이 내 아내구나” 직감했다고 회고한다. 벨라 역시 자신의 회고록에서 샤갈의 눈빛을 “하늘과 물처럼 신비로운 녹회색”으로 기억하며 “마치 강물 위에 떠 있는 듯 그의 눈에 빠져들었다”고 적고 있다.
두 사람은 뜨거웠지만 그 앞에는 냉정한 현실의 벽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벨라는 비테브스크(현재의 벨라루스)의 부유한 유대인 보석상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교양과 미모를 갖춘 여성이었다. 반면 샤갈은 비테브스크 인근의 하시디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생선 가게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야채를 파는 어머니 사이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어렵게 자랐다.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무명의 젊은 화가. 벨라의 부모가 “그와 살면 굶게 될 것”이라며 결사반대할 만했다. 그러나 벨라는 거의 매일 샤갈의 작업실을 찾아가 그의 끼니를 도왔고 작업에 필요한 재료까지 직접 날랐다.

가족의 반대를 넘어 결국 두 사람은 약혼에 이르게 되고 사랑을 지켜낸 무렵에 탄생한 작품이 ‘검은 장갑을 낀 나의 약혼녀’다. 샤갈이 벨라를 그린 초창기 작품으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기 전 거장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순백의 드레스와 어두운 배경이 이루는 선명한 대비는 벨라가 지닌 우아함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검은 장갑은 벨라의 품격을 드러내며 그녀를 향한 샤갈의 경외의 감정까지 드러낸다. 두 사람의 배경적 차이는 때로 샤갈에게 열등감을 안겼지만 벨라는 남편의 감수성과 생각을 더 깊고 넓은 방향으로 이끄는 지적 멘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별의 애틋함이 낳은 걸작

약혼 이후 샤갈은 더 넓은 예술의 세계로 나아갔다. 1910년 후원자 막심 비나베르의 장학금을 지원받아 당대 예술의 중심,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파리는 입체주의와 야수주의를 비롯한 혁명적인 미술 운동이 요동치던 세계 예술의 심장이었다. 샤갈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동체 라 뤼슈(La Ruche)에 머물며 기욤 아폴리네르, 로베르 들로네 등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교류했고 현대미술의 새 흐름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샤갈의 마음은 언제나 고향 비테브스크, 벨라를 향해 있었다.
4년간의 이별은 샤갈이 혁신적 미술 사조를 받아들이는 한편 벨라라는 정신적 나침반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숙련의 시간이었다. 그 결실이 샤갈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나와 마을’이다. 초록색 얼굴의 샤갈과 흰 염소가 정답게 서로를 마주 보는 이 작품은 파리에서 익힌 입체주의 조형 어법과 비테브스크를 향한 향수가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조화롭게 녹아든 명작이다. 이 작품은 유대인으로서의 뿌리와 고향 러시아의 감수성을 독창적 화풍으로 승화시키며 거장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된다.
1914년 샤갈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와 이듬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벨라와의 결혼을 허락받게 된다. 벅찬 행복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생일’이다. 결혼식을 앞둔 7월 7일, 가난한 화가 샤갈은 자신의 생일조차 잊은 채 작은 방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벨라가 꽃다발과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들고 깜짝 방문한다. 벨라는 회고록 ‘첫 만남’에서 인상적인 순간을 시적인 문장으로 남겼다. “당신은 한쪽 다리로 서서 작은 방이 당신을 더 이상 담을 수 없다는 듯 천장까지 솟아올랐죠. 당신은 머리를 아래로 돌려 내게 키스했고 우리는 꽃핀 들판과 지붕들 위를 날아갔어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곡예 같은 자세, 중력을 거스르듯 공중으로 떠오른 몸,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동화적인 세계로 바뀌는 장면은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술적 나침반, 아내

결혼 이후 벨라는 샤갈의 삶 속에서 조언자이자 비평가, 번역자, 저자로 활동하며 멘토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샤갈이 그녀의 “예”와 “아니오”를 작품 완성의 마지막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벨라가 그의 예술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마다 샤갈이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길을 비춰준 생존의 나침반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샤갈이 비테브스크 인민미술학교를 이끌던 시기에 말레비치 같은 급진적 예술가들과 예술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된다. 이때 벨라는 정치적 흐름에 예술을 종속시키는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며 화가로서 독자적인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일깨웠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 예술의 자유가 위협받는 현실을 직시한 벨라는 샤갈이 러시아를 떠나 서구로 망명해야 한다는 판단을 굳히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1922년 파리 정착 이후 벨라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은 샤갈이 파리 예술계로 진입하는 징검다리가 돼줬다. 샤갈이 거물급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의뢰로 고골의 ‘죽은 혼’ 삽화 작업을 할 당시, 벨라는 곁에서 원작을 낭독해주며 그의 붓끝을 문학적 서사와 연결해줬다.
1931년 파리에서 출간된 샤갈의 자서전 ‘나의 인생’은 두 사람의 협업이 빚어낸 눈부신 결실이었다. 샤갈이 러시아어로 써 내려간, 기억의 파편으로 이뤄진 거친 원석을 모스크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벨라는 문학적 결을 더해 한 권의 자서전으로 완성했다. 그녀는 원고를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해 샤갈이 세계적 거장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길도 열어줬다.
◇하나의 영혼과 두 가지 표현

벨라 자신의 문학적 성취 또한 뛰어났다. 유럽에 나치즘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35년부터 벨라는 모국어인 이디시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유대인 가정의 의례와 축제, 비테브스크의 풍경을 섬세한 문장으로 되살려냈다. 벨라가 복원해낸 유대 공동체의 기억은 샤갈의 그림에서 기억과 사랑, 상실의 정서로 형상화됐다. 벨라 사후인 1946년과 1947년에 각각 출간된 ‘타오르는 불빛’과 ‘첫 만남’은 벨라의 펜과 샤갈의 붓이 합쳐진 특별한 형태의 합작물이다. 비평가들이 그들의 작업을 “하나의 영혼에서 나온 두 가지 표현”에 빗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44년 샤갈은 삶에서 가장 깊은 고통을 겪는다. 망명지 미국에서 벨라가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벨라의 죽음 앞에서 샤갈은 모든 그림을 벽 쪽으로 돌려놓은 채 9개월 동안 붓조차 들지 못할 만큼 무너져 내렸다. 긴 침묵을 깨고 상실의 아픔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그녀 주위에’(1945)다. 사랑의 환희를 노래하던 밝은 색채는 비탄과 절망을 머금은 푸른 색조로 바뀌고 캔버스에는 그리움과 애도의 정서가 스며든다. 화면 속 둥근 공간 안에 비테브스크의 풍경이 있고 딸 이다가 하늘을 날며 고향의 기억을 소중히 붙잡고 있다. 화면 아래 부채를 들고 장밋빛 의상을 입은 젊은 날의 벨라와 머리를 거꾸로 돌린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는 샤갈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 벨라는 사랑과 비상의 원천이었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리움과 영원의 상징이 된다. 벨라는 샤갈의 마음속 본향(本鄕)이자 동화적 세상으로 그를 이끌어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벨라의 손길은 샤갈이 98세로 숨질 때까지 그의 작품에서 살아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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