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렛서 산 재고 보드 타고… 밀라노서 날아오른 유승은
[남정미 기자의 정말]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스노보드 빅에어 동메달 유승은

지난 2월 열린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 올림픽에서 유승은(18)은 재고품 보드를 타고 스노보드 빅에어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아웃렛에서 40% 할인받아 구매한 50만원대 보급형 보드다.
빅에어는 아파트 20층 높이와 맞먹는 55m 지점에서 도약해 단 한 번의 점프로 공중 연기와 비거리, 착지를 종합 평가하는 종목이다. 1차 시기 등을 지고 도약해 공중에서 네 바퀴를 회전하는 ‘백사이드 트리플콕 1440도’에 성공했고, 2차 시기엔 다시 정면 방향으로 도약해 네 바퀴를 회전하는 ‘프런트사이드 트리플콕 1440도’를 해냈다. 한국 설상(雪上) 종목 최초 여성 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2차에 한 기술은 전 세계에서 5명 정도만이 소화할 수 있는 최고 난도 기술로 꼽힌다.
유승은은 출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대표팀 막내였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체능을 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비인기 동계 종목을 한다는 건 열여덟 고등학생을 일찍 철들게 했다. 발목뼈가 부러지는 부상보다 그 때문에 참여 못 한 캠프비 300만원 날리는 게 더 무서웠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계속한다는 게 부모님이 고생한다는 것과 동의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이 고등학생 메달리스트는 메달을 따놓고도 기자회견에서 “다음 올림픽 출전은 모르겠다”고 했다. 운동을 계속하는 게 부모님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이후 약 2개월, 이 ‘모르겠다’가 어떤 확신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광화문 일대가 온통 초록으로 물든 이달 중순 유승은을 만났다. 털모자와 두꺼운 방풍 점퍼 대신, 일자로 자른 뱅 스타일 앞머리에 학교 체육복을 입고 등장한 유승은 선수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올림픽 출전길에 수학 문제집을 챙겨 가고, 경기 내내 영하의 추위로 양 볼과 코끝이 빨갛던 겨울 소녀는 이제 영락없는 대한민국 고3 학생이 돼 있었다.

◇재고품 보드 아무렇지 않았다
-어떻게 지냈나요.
“이제 고3이라, 웬만하면 다른 일정이 있어도 학교 수업은 빠지지 않고 들으려고 해요. (이날 인터뷰도 수업이 다 끝난 오후 6시에 했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엔 체육관에서 2시간 정도 재활을 겸한 체력 훈련을 하고요. 보통 4월에 해외로 전지훈련을 많이 가는데, 일정 조율 중입니다. 5월에는 아마 (국가)대표팀 소집이 있을 것 같아요.”
-올림픽 이후 바뀐 게 있나요.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방송 출연도 했고요. 우리 반뿐 아니라 평소 제가 몰랐던 친구들도 사인을 다 받아 가서 신기했죠. 담임선생님은 이번에 우리 학교 첫 부임이신데 ‘성복고에 유승은이 있대서 놀랐는데, 우리 반이어서 더 놀랐다’며 반가워해 주셨어요. 무엇보다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죠. ‘나는 이제 빚을 갚았다’라는.”
-마음에 빚이 있었나요?
“아니요, 하하! 진짜 빚이요. 포상금이 아직 다 지급되진 않았는데, 일부 받은 걸로 부모님이 대출받은 금액을 조금 상환했거든요.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어요.”
유승은은 2024년 5월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고, 이듬해 초 롯데 스키앤스노보드팀 소속이 됐다. 이전까지는 모든 훈련비를 100% 자비로 부담했다. 특히 엘리트 선수로서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2023년엔 뉴질랜드로 3개월간 전지훈련을 떠나는 등 그해 훈련비로만 약 1억원 이상을 썼다. 부모 수입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집 담보 대출을 받았다. 유 선수 아버지는 농업에 종사하고, 어머니는 4년 전부터 프랜차이즈 빙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유 선수 위로는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어머니 이희정(47)씨는 “동메달이 확정되고 숙소에 돌아간 승은이에게 전화가 왔는데, 첫 마디가 ‘엄마, 우리 집 빚 얼마야?’였다”고 했다. “‘이자 나가니까 일단 그거부터 빨리 갚자’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니, 부모로서 도와주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빚을 졌는데, 아이에게 그게 그렇게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국내에서는 훈련을 할 수 없는 건가요?
“국내엔 훈련 여건이 거의 갖춰져 있지 않아요. 일본이나 중국엔 여름에도 훈련할 수 있는 ‘에어매트(골격 구조물과 인조 슬로프, 부상 방지를 위한 착지 매트로 구성된 시설)’가 있거든요. 에어매트가 있으면 눈이 없어도 부상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점프와 회전 등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엔 이 시설이 아예 없어요. 국내에 제대로 된 에어매트만 있어도, 선수들이 해외 나가는 횟수가 크게 줄어들 거예요.”
세계에서 인정하는 스노보드 강국 일본엔 니가타·나가노·홋카이도 등 에어매트 시설이 20곳 가까이 존재한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중국 역시 2010년대 초부터 국가 주도로 에어매트 훈련장을 구축했다. 유 선수는 “전체적인 훈련 환경은 일본이 좋고, 시설 면에선 일본 선수들도 마지막엔 중국에 가서 체크할 정도로 중국이 최상급”이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재고로 산 보드를 타 화제가 됐는데.
“사실 국가대표라고 해서 개인 장비까지 지원해주진 않거든요. 재고품이라고 해도 중고가 아니라 새것이잖아요. 저는 전혀 상관없었어요. 그걸로도 충분히 괜찮았어요.”
선수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올림픽 현장에서 우연히 유승은의 보드를 본 스노보드 브랜드(Burton) 본사 관계자는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유승은에게 신형 보드를 선물했다. 해외 유명 선수나, 국내 정상급 선수들은 후원 계약을 맺고 개인 맞춤형으로 주문 제작한 보드를 타는 경우가 많다. 유승은은 후원사가 따로 없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에서 금메달을 딴 최가온 선수와 동갑이죠.
“가온이를 보면 정말 (보드를) 잘 탄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구지만 존경하는 선수예요. 올림픽에서도 경기 전에 만나 서로 많이 응원해 줬습니다.”
◇부상보다 훈련비가 더 무섭다
유승은은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보다 늦게 스노보드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보드에 입문했고, 5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이희정씨는 “집 근처 체육센터에서 수영·탁구 등을 시켰는데 뭐든 평균 이상이라, 선수로 키워보겠단 제의가 여러 곳에서 있었다”며 “탁구는 실제 유소년 선수 생활까지 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시구자로 나섰는데, 해설진이 “여자 야구 해보는 것도 추천한다”는 이야기를 할 만큼 포수를 향해 정확하게 공을 던졌다. 유승은은 “아무래도 아빠를 닮은 것 같다”며 웃었다. 만능 스포츠맨인 유 선수 아버지는 스노보드 동호인 생활을 했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영상을 밤새 분석해 딸을 가르친 것도 아버지였다.

-국가대표가 되기 전 대부분 전지훈련을 아버지와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아빠가 빨래부터 설거지, 장비 세팅, 운전까지 다 해주셨어요. 일본은 도시락 문화가 잘돼 있는데도, 제가 플라스틱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게 싫다며 항상 보온 도시락통에 직접 점심을 싸주셨고요. 야채 카레, 브로콜리 만둣국, 당근 된장국…. 영양을 생각하면서도 창의적인 아빠만의 메뉴가 많았습니다(웃음). 다른 가족들은 ‘아빠 음식이 진짜 맛있느냐’고 하는데, 저는 늘 맛있게 먹었어요. 아빠에게 많이 고맙죠."
-아버지가 사실상 코치 역할도 하셨다고요.
“기술 문제로 싸운 적도 많아요(웃음). MBTI로 치자면 저는 F(감성적)인데, 아빠는 대문자 T(이성적·현실적)거든요. 이번에도 ‘너는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니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죠. 어쩌면 메달 딴 게 아빠에 대한 반항일지도 몰라요(웃음).”
그런 아버지는 한 번도 딸의 경기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유승은은 “아빠는 심장 떨려서 TV로도 못 보실 것”이라고 했다. 이번 올림픽도 엄마와 언니만 따라갔다. 천주교 신자인 유승은의 언니는 세례를 받은 후 가장 먼저 “동생이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했다. 세례 후 첫 기도는 신이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올림픽 직전에 부상을 여러 번 겪었죠.
“2024년 10월 스위스 쿠어에서 열린 월드컵에 나갔다가 발목을 다쳤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응원하러 나와서, 당시엔 너무 창피해서 아픈데도 꾹 참고 그냥 걸어 나왔죠.”
당시 아버지 없이 혼자 간 대회였다. 현지에서 병원도 가지 않고 바로 인천으로 귀국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나온 유승은의 오른발이 평소보다 2배 이상 부어 있었다. 오른발목 골절에 인대까지 파열된 큰 부상으로, 철심 박는 수술을 했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딸에게 운동을 그만두자고 했다.
-뭐라고 답했나요.
“여기서 가장 속상한 사람은 난데, 엄마가 울면 어떡하느냐고 했죠. 저는 사실 그때도 ‘얼른 다시 (대회장으로) 가고 싶다. 빨리 보드 타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거든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예선에서 1등으로 올라갔었기 때문에, 결선에서 뭔가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런 유승은도 그다음 해 올림픽을 3개월 앞두고 또다시 오른쪽 손목이 골절됐을 땐, 처음으로 운동을 그만두겠단 마음을 먹었다.
-왜 그만둘 생각을 했나요.
“자꾸 다치니까 ‘아, 어쩌면 이 운동이 나랑 안 맞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첫째였고요. 둘째는 대표팀에서 간 거라 체류비나 비행기 값은 안 들었지만, 캠프 참가비 300만원은 자비로 내야 했거든요. 이런 일이 생겨서 또 캠프비를 날리게 될까 봐…. 부상보다 그게 더 무서웠어요. 딱 3일 참가했는데, 환불도 안 되더라고요."
올림픽 메달 딴 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강심장 유승은은 이때 처음으로 이틀을 내리 울었다. 그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가족들이 모두 눈물바다인데, 아빠는 ‘이거 안 한다고 세상 안 끝난다’며 웃으시더라고요. 그게 위로가 됐어요.” 유승은은 부상 한 달 뒤, 골절된 손목에 깁스를 하고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빅에어 월드컵 결선에 나갔다. 이곳에서 한국 스노보드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연습 훈련 때 ‘되겠다’ 싶었다
유승은이 이번 올림픽 2차전에서 선보인 ‘프런트사이드 트리플 콕 1440도’는 사실 눈 위에선 처음 해보는 기술이었다. 대개 고난도 기술은 에어매트에서 충분히 훈련한 뒤, 눈에서 이를 적용하는 시간을 갖는다. 유승은은 부상 때문에 눈에서 이를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 이씨는 “올림픽 전에 1시간 연습 시간을 주는데, 아이가 자꾸 넘어지더라. 속으로 ‘이거 안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유승은은 달랐다. “오히려 이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 번도 성공을 못 했는데, 왜 ‘되겠다’ 싶던가요.
“넘어지긴 했지만, 어떻게 하면 될지 감이 잡혔어요. 올림픽 가기 전 아빠는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놀다 오라’고 했거든요. 이탈리아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아빠 말대로 하려고 했는데, 연습할 때 점프대를 타보니 ‘괜찮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랜딩 존 각도와 설질(雪質)이 다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2차전 직후 보드를 던지는 세리머니가 화제가 됐는데.
“두 번째 시도한 기술이 눈에서 처음 성공한 거라 너무 신나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던지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던진 건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흥분한 것 같아요, 하하!”
-메달 색깔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솔직히 마지막 3차 시기에 더 잘했다면, 은메달까지는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죠. (빅에어는 1·2·3차 시기 중 점수가 높은 두 시기를 합산해 최종 순위를 매긴다. 유승은은 3차 시기 착지에서 넘어져 이 점수가 제외됐다.) 그렇지만 출전 자체가 목표였기 때문에 동메달만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고, 특히 엄마가 처음 해외 경기에 오셨는데 메달을 따서 너무 기뻤어요.”
이희정씨는 “처음엔 따라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승은이가 엄마가 꼭 왔으면 좋겠다고, 와서 언니랑 자기 경기도 보고 이탈리아 관광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신혼여행 이후 해외여행은 20년 만에 처음이거든요. 방값이 너무 비싸 결국 숙소는 승은이 경기장 근처엔 못 잡았지만, 1시간 거리를 운전해 다니면서도 딸이 메달 따는 모습 볼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훈련하기 싫을 때는 없나요.
“사실 체력 훈련은 맨날 하기 싫고요(웃음), 보드 타는 건 좋아하기 때문에…. 날씨가 너무 춥거나 더울 때 빼고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11월만 돼도 보드 타다 눈에 옷이 젖으면 춥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다시 점프대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안 추워져서 괜찮아요."
-스노보드가 왜 좋나요.
“처음엔 기술을 하나씩 늘려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친구들 만나 보여주면 ‘와, 너 멋있다’ 이런 이야기 듣는 것도 좋았고요. 평소 저는 눈에 띄는 걸 싫어하거든요. ‘아무도 날 안 봐줬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제일 큰데, 보드 탈 때만큼은 저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좋아요. 모든 사람 눈에 저를 가장 멋지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유승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스키·스노보드협회 등에서 포상금을 받는다. 협회 회장사를 맡아온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사재로 격려금을 추가 지급했다. 지난 9일엔 ‘경기도 글로벌 스타’ 사업 첫 번째 대상자로도 선정돼, 국외 전지훈련비 명목으로 일부 지원받을 예정이다.
-훈련 비용 충당이 어려워지면 언제든 스노보드를 접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4년 후 올림픽 나가는 것까지는 해볼 생각입니다. 이번 빅에어 여자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 무라세 코코모 선수를 따라가고 싶어요. 베이징 올림픽 때 여자 빅에어에서 동메달을 땄고, 이번 밀라노에서 금메달을 땄거든요.”
-올림픽에도 수학책을 챙겨갔는데.
“수학은 개념을 놓치면 나중에 따라잡기 어렵잖아요. 많이 풀진 못했어요(웃음). 일단은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도전해 봐야죠. 당분간은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추기 위한 국어와 영어 공부에 매진해야 하겠지만, 언젠간 수학 공부도 꼭 다시 제대로 하고 싶어요. 스노보드를 안 한다면 수의사에도 도전해 보고 싶고…."
꿈을 말하는 열여덟 유승은의 눈이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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