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모스크바·베이징, ‘3각 밀약’이 남침의 방아쇠를 당겼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2026. 4.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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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김일성, 6·25 전쟁 앞두고
스탈린·마오쩌둥과 비밀 회담
일러스트=한상엽

1949년 2월 22일, 북한 정부 수립 이후 첫 소련 공식 방문을 위해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이 열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했다. 일행은 보름 가까이 지난 3월 4일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이튿날 스탈린은 김일성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만찬 자리에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군사적 수단을 통한 남한 해방이 불가피하다. 남한 반동 세력들은 조국의 영구 분단을 획책한다. 인민군은 강하며, 남한 곳곳에서 공산 유격대가 지금도 교전 중이다”라며 ‘남침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지금 남한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첫째, 인민군 전력이 아직 남한 군대를 압도하지 못했고, 둘째, 남한에 미군이 여전히 주둔 중이며, 셋째, 38선에 관한 소련과 미국 간 협정이 유효하다”며 딱 잘라 거부했다. 다만, 김일성의 남침 야욕 자체를 꺾은 것이 아니었고, 차분히 전쟁을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라는 지령이었다. 4월 7일, 평양으로 귀환한 김일성은 인민군 병력 확충과 무기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동아시아 정세는 공산 진영의 연전연승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은 공산 진영의 바람대로 남한에 군사고문단 500여 명만 남기고 철수했다.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고, 10월에는 국공 내전에 승리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중국 전역이 공산화되는 순간에도 미국은 중국의 국공 내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를 목도한 김일성은 미국이 ‘한국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 외상 관저에서 열린 주중 대사 이주연 환송 오찬에서 김일성이 시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 대사에게 스탈린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중국 해방이 완성됐으니 다음 순서는 남한 해방이다. 남한 해방을 위해 인민군의 남침이 필수적이다. 이에 대한 지령을 받으러 스탈린과 면담하고 싶다. 나는 공산주의자이고, 공산주의 군사 훈련을 받은 자로서 스탈린의 지령은 내게 법이다. 나의 판단만으로 전쟁을 개시할 수 없다.”

그때쯤 스탈린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다만, 전쟁을 승인하더라도 소련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도록 개전의 책임은 북한, 병력 지원과 뒷수습은 중국에 떠넘길 ‘큰 그림’을 구상했다. 1월 말 시티코프는 “그 문제라면 언제라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스탈린의 지령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은 너무 기뻐 “그게 사실이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

1949년 3월 소련을 공식 방문한 김일성(앞줄 맨 왼쪽)과 박헌영(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환영하는 의장대 사열식. 이 방문 때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거부했지만, 1년 뒤인 1950년 4월 비밀회담에서 ‘중국의 지원’을 전제로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일성과 박헌영은 6·25전쟁 개전을 석 달 앞둔 1950년 3월 30일에서 4월 25일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세 차례 면담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으로부터 ‘남침 이후 상황이 불리해지면 중국이 지원하겠다’는 보장을 받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더라도 소련은 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미국의 참전 가능성을 제대로 검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뒤에 있고, 미국이 더는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호언했다. 중국의 지원 여부에 대해서 “중국 혁명 성공 이후 마오쩌둥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스탈린을 안심시켰다. 박헌영도 스탈린에게 “전쟁이 발발하면 20만 남로당원이 인민 봉기를 일으켜 남한 정부를 무너뜨릴 것”이라며 김일성을 거들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3단계 남침 계획에 합의했다. “1단계, 38선 부근에 병력 집중 배치. 2단계, 북한이 남한에 평화통일 제안. 3단계, 남한이 거부하면 이를 반박한 후 군사 행동 개시.” 스탈린은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하며 남한과 미국이 반격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미국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 한국 전 인민이 ‘새로운 정부’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중국이 공산화된 데 이어 한반도까지 공산화될 경우,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교두보를 상실하고, 일본과 태평양까지 위협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상 중국의 공산화는 남한에 대한 미국의 방어 의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럼에도 소위 ‘3일 승리론’을 맹신한 김일성은 설령 미국이 참전할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민군이 ‘3일 만에 전쟁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라 오판했다.

4월 25일 모스크바 비밀 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인 5월 13일 비행기 편으로 베이징으로 출발했다. 얼마나 시급한 사안이었던지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비밀회담은 그날 밤 시작됐다. 김일성이 무력 통일 계획을 스탈린이 승인했다고 말하자, 중국이 ‘증거’를 요구해 회담은 일시 중단됐다. 11시 30분, 늦은 밤이었음에도 저우언라이 총리 겸 외상이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중국 주재 소련 대사 로신에게 ‘남침 승인’에 대해 스탈린이 직접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 비신스키 외상은 암호 전보로 지체 없이 회신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필리포프(스탈린의 암호명)는 한반도 통일에 관한 김일성 동지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반드시 북한과 중국 동지가 함께 내려야 한다. 만일 중국 동지들이 거절한다면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이 문제는 연기돼야 한다.”

소련이 남침을 승인하지만 책임은 북한과 중국이 함께 지라는,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실속 있는 결정이었다. 5월 15일, 김일성과 다시 만난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제안’하고, 스탈린이 ‘승인’한 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또한 “소련은 미국과 ‘38선 협정’ 때문에 참전이 쉽지 않지만, 중국은 아무런 의무가 없으므로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면 중국은 병력을 동원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합의로 6·25전쟁이 발발했음을 함께 모의한 ‘당사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개전 이후 북한은 ‘미제와 이승만 괴뢰정권의 북침’이라 새빨간 거짓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0년대 공개된 소련의 ‘한국전쟁 관련 극비 문서’를 통해 남침이 ‘사실’로 확정된 이후에도 북한은 ‘미국과 남조선의 북침에 맞선 조국 해방 전쟁’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참고 문헌>

남시욱, 6·25전쟁과 미국, 청미디어, 2015

안문석, 북한 현대사 산책 2, 인물과사상사, 2016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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