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국채 악순환 끊기, 다카이치 ‘돈 더 쓰기’ 승부수 통할까
[이창민 도쿄 리포트] 국채 잔고 1000조엔 시대…사나에노믹스의 역발상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3134277ppqs.jpg)
1946년 물가상승률 수백 퍼센트 넘기도
1947년 4월 시행된 재정법 제4조는 전쟁과 초인플레이션의 기억이 조문으로 굳어진 결과였다. 국가의 세출은 기본적으로 세입으로만 재원을 마련하되, 공공사업비 등 인프라 정비를 위한 건설국채만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재정법 제5조는 일본은행이 국채를 직접 인수하는 행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전후의 황폐를 딛고 일어선 일본 경제는 1950년대부터 고도성장 궤도에 올라탔고, 쏟아지는 세수 덕분에 국채에 의존하지 않고도 나라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재정법 시행 이후 18년간 일본 정부는 건설국채든 적자국채든 국채를 단 한 장도 발행하지 않았다.
건전재정의 원칙이 처음 흔들린 것은 1965년이었다. 도쿄올림픽 이후 반동으로 경기가 급격히 냉각됐고,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보정예산의 재원으로 전후 처음 건설국채를 발행했다. 당시 후쿠다 다케오 대장성 장관은 세 가지를 약속했다. 공공사업에 한정하며, 일본은행이 직접 인수하지 않고, 이번 한 번만이라는 것이었다. 건설국채는 도로나 항만처럼 후세에 자산으로 남는 인프라의 재원으로, 재정법 제4조가 명시적으로 허용한 예외이기도 했다. 국채 의존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지만, 재정법이 지키려 한 핵심 금기선은 아직 넘지 않았다.
그 선이 무너진 것은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후였다. 고도성장이 끝나면서 불황이 세수를 직격했고, 1975년 미키 다케오 내각은 경상 지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특례공채법을 별도 제정해 적자국채를 발행했다. 전시 국채 남발이 초래한 초인플레이션의 기억 위에 세워진 재정법이 가장 단단히 봉인해둔 금기가 마침내 깨진 것이었다. 이후 나카소네 내각을 중심으로 재정재건 노선이 추진되고 1980년대 후반 버블경기의 세수 폭증이 겹치면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년간 적자국채 신규 발행이 실적 기준으로 제로가 되는 반짝 희망이 찾아왔다. 그러나 버블 붕괴와 함께 그 꿈은 끝났고, 1994년부터 적자국채 발행이 재개됐다.
버블이 꺼지자 재정은 양쪽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았다. 땅값과 주가의 폭락은 세수를 직격했고, 경기를 떠받치기 위한 공공사업 지출은 오히려 늘어났다. 여기에 고령화라는 구조적 요인마저 겹쳤다. 1990년도에 11조6000억 엔이던 사회보장 관련비는 2026년도 39조1000억 엔으로 한 세대 만에 세 배 반이나 불어났다. 보통국채 잔고는 1990년도 약 166조 엔에서 10년 만에 약 370조 엔으로 두 배 이상 늘었고, 2024년도에는 1000조 엔을 넘어섰다.

고이즈미 내각의 국채 30조 엔 상한 공약도 대부분 지켜지지 못했고, 아베 내각이 설정한 2020년도 기초재정수지(PB) 흑자화 목표도 코로나를 거치며 2025년도로 연기된 뒤 끝내 달성되지 못했다. 스가, 기시다 내각을 거치는 동안에도 건전재정을 향한 방향성은 재확인됐지만, 매번 대규모 보정예산이 목표를 무력화했다. 보통국채 잔고는 2025년도 1129조 엔에 달했다. 어떤 정권도 재정 건전화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어떤 정권도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재정 적자는 그렇게 일본 정치의 해결 불가능한 숙제로 굳어졌다.
그러던 중, 이 오랜 숙제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풀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직후 이렇게 말했다. 축소균형을 초래하는 지나친 긴축재정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로서의 적극재정이 국력을 강하게 한다. 이름하여 책임 있는 적극재정이다. 표현만 보면 역대 어느 정권이나 해온 재정 팽창의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카이치 노선에는 이전 정권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단순히 지출을 늘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 재정 논의를 지배해온 몇 가지 인식 자체를 뒤집으려 한다는 점에서다.
첫 번째는 국가채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인식이다. IMF 기준 2025년 일본의 총부채 비율은 230%로 주요 선진국 중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정부 보유 금융자산을 차감한 순부채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부채 비율은 130% 정도로, 총부채와 100%포인트 차이가 난다. 그 핵심은 세계 최대 공적연금기금 GPIF로, 2025년 12월 말 기준 약 293조 엔을 운용 중이다. 물론 GPIF 적립금은 채무 변제에 임의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며, 순부채 기준으로도 일본의 부채비율은 여전히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총부채 수치 하나가 재정 건전성의 전부인 양 통용되어 온 담론의 일면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다카이치의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한국, 정부부채 비율 낮지만 속도가 문제
두 번째는 60년 상환룰이 재정 건전화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다. 일본은 1968년 이래 국채 원금을 60년에 걸쳐 상환하도록 설계해 두었다. 매년 국채 잔고의 1.6%를 국채정리기금특별회계에 적립하는 이 방식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일본만의 제도다. 주요 선진국은 국채 만기가 돌아오면 새 국채를 발행해 기존 채무를 돌려막는 차환(rollover)을 표준 관행으로 삼는다. 실제로는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상환 재원은 결국 새 국채 발행으로 조달된다.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빚의 형식만 바꾸는 셈이니, 60년 상환룰은 재정 건전화의 실질적 효과도 없이 국채비 규모만 실제보다 부풀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핵심은 부채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2025년 일본의 명목 GDP 성장률은 4.5%로,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 2.4%를 웃돌고 있다. 경제성장 속도가 부채증가 속도보다 높은 상태가 유지되는 한 국채 잔고의 절대액이 늘어도 GDP 대비 채무 비율은 안정적으로 관리된다. 실제로 GDP 대비 공채 잔고 비율은 2022년도 211%를 정점으로 2023년도 205%, 2024년도 203%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PB 적자가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채무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재정 건전화의 왕도는 긴축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논거가 숫자로 뒷받침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이 호조건이 앞으로도 지속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금리 정상화가 진행될수록 명목이자율은 서서히 상승할 것이고, 그것이 성장률을 따라잡는 순간 지금의 논리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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