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만든 실 한올 한올이 세상 뒤덮는 상상”

서정민 2026. 4. 1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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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의 변신
한지로 실을 만들고 원단을 직조하는 기술로 특허 등록까지 마친 ‘포목’ 배영진 대표. 최영재 기자
지난 3월 26일 서울 세검정에 있는 3층짜리 건물 안에 작은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첫 번째 기획 전시는 ‘한 올, 한 장’. 한지와 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자리다. 전시장에는 정창섭·이진우 등 한지를 활용한 현대 작가 원로들의 작품이 전시됐는데 그중 먼저 눈에 띈 것은 2023년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을 옮긴 태피스트리(염색된 실을 이용해 모양을 짜나가는 섬유 공예)다. ‘묘법’ 연작은 박 화백이 한지를 반죽해서 질감을 낸 모노크롬 회화인데,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두꺼운 실로 만들어졌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2~3년 간 함께 의논하며 작업한 거예요. 작품이 완성됐을 때 참 좋아하셨죠.”
고 박서보 선생의 대표작 ‘묘법’ 연작을 태피스트리로 옮긴 작품. [사진 포목]
박 화백과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이는 이번 전시를 준비한 ‘포목(pomok)’의 배영진(70) 대표다. 갤러리가 들어선 건물은 원단 기업 ‘포목 더 텍스타일 아카이브’의 본사이자 연구실이다. “조선시대부터 다양한 원단을 모아 팔던 상점을 ‘포목점’이라고 불렀죠. 그 개념을 이어 오늘날의 포목점을 만든다는 의미에요.”

‘포목’ 건물이 들어선 세검정은 조선시대 때 서적에 필요한 한지를 제조, 관리했던 조지서가 있던 곳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도 ‘한지’다. 배 대표가 이렇게까지 한지를 키워드로 내세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포목’에서는 한지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원단을 짠다.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한지 사(絲)를 특허 내고 ‘멀벡사’라는 이름도 붙였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빔스, 골드윈, 유나이티드 애로우, 베이 크루즈 등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의류 브랜드들의 책임자를 만나 상담도 했다. 자국 원단 산업이 활발한 일본이지만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며 상담을 이어갈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 산업으로서 세계에 소개되기를 바랐던 배 대표의 오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한지에 백자를 수놓은 배영진 대표의 작품. [사진 포목]
배 대표는 1993년부터 20년 간 ‘꼬세르 배영진’이라는 모던 한복 브랜드를 운영했다.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지만 한복 디자인을 할 줄은 몰랐다는 그녀는 조각가인 남편을 따라 스페인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혹시 몰라 특별한 날 입으려고 가져갔던 한복은 무용지물이었어요. 파티장 분위기와 전통 한복은 어울리지 못했죠. 특히 춤 출 때 한복은 정말 불편한 옷이었거든요.” 스페인에서 돌아온 90년대에 마침 한복을 현대화한 브랜드들이 등장했지만 역시 배 대표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한복을 현대화했다는데 대중에게는 노동복이나 운동복(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주로 입던)으로만 인식됐죠. 전통의 현대적 해석은 둘째 치고 예쁘지 않았으니까요.”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배 대표가 몇 벌 디자인한 한복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급기야 배우 고두심씨가 방송에 입고 출연한 이후에는 대중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브랜드 ‘꼬세르 배영진’을 운영하면서 김옥숙·이희호·권양숙 여사 등 역대 영부인들과 박서보 화백 같은 예술인, 고두심 등 배우들의 옷을 만들었다. 2007년에는 크게 히트 친 드라마 ‘궁’의 의상 제작 총괄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내 사업이 잘 되는 것과는 별개로 한복의 현대화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어요. 대중이 한복을 더 많이 입게 된 것도 아니고, 한복을 현대화 하기 위한 정부의 논의도 제자리걸음이었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옛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었는데, 그 모멘텀을 나 혼자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정부와 주변 디자이너들에게 쓴 소리 하는 악역을 맡기도 싫고. 딱 20년이 되는 2013년에 꼬세르를 미련 없이 접었죠.”

이후 배 대표가 골몰한 분야는 ‘원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패션 산업에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소재, 즉 원단이 기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단의 색감·질감·촉감·구조에 따라 옷이라는 결과물은 무궁무진하게 달라질 수 있죠.” 15년간 원단 사업에 매달리면서 글로벌 패션 하우스에서 의뢰 받아 트위드·자카드·누빔·천연 염색 등 다양한 원단을 제작해 납품하기도 했다.

동시에 한지로 원단 만들기를 연구했다. “한지는 루브르박물관이 예술품 보존을 위한 소재로 채택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 것처럼 오래 가고, 통기성도 좋고, 몸에도 좋고, 닥나무를 베어서 쓰는 게 아니라 닥나무 껍질을 벗겨 만들기 때문에 자연친화적인 소재죠. 하지만 한지를 얇게 찢어서 꼬아 실을 만드는 일은 현대의 과학적 기술이 접목돼야 가능해요. 원단을 만들 정도의 실이 되려면 그 두께가 균일해야 하는데 그 기술이 의외로 까다롭고 어렵거든요.”

일본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플리츠 플리즈’는 이세이 미야케라는 출중한 디자이너의 역량도 있었지만 플리츠 기법의 주름 원단을 개발했기에 글로벌 확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원단은 여름 소재라는 단점이 있다. 두꺼운 방한용 옷을 만들 수 없다. 반면 멀벡스는 그 비율을 달리 해서 울·면·나일론 등 어떤 원단과 합사하는가에 따라 한지의 장점은 살리고 디자이너의 창조성은 십분 발휘될 수 있다고 한다.

“실 한 올의 힘이 뭐 그렇게 대단할까 하겠지만, 그 실 한 올이 원단이 되고, 잘 만든 원단은 옷 뿐만 아니라 가구 등 원단이 사용되는 모든 산업에 활용되죠. 실 한 올이 천 갈래 만 갈래로 퍼져서 세상을 덮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나죠?(웃음)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가 나와서 한지를 이용한 실로 옷을 만들고, 그 옷이 세계로 소개되는 꿈을 꿉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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