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송영숙 만든 한마디 “눈이 좋아, 사진 안 하면 벌 받지”

2026. 4. 1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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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폴라로이드 위에 유채, 85x53㎜, 2017년. [사진 뮤지엄한미]
송영숙은 1948년 경북 김천에서 5남 1녀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송재성은 치과의사로 김천의 명망가였다. 김천문화원장을 지낸 그는 문화적 소양이 깊었다. 고암 이응노가 김천을 찾아와 머물면 말벗이 되어주었다. 이응노는 송재성에게 묵화 10여 점을 건넸다. 김천 장날마다 장터에 나가 골동품을 사서 모으는 게 송재성의 취미였다. 그 취미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모습을 부인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송영숙이 열한 살 때다. 가죽나물을 데치기 위해 불을 때던 어머니는 불쏘시개용 잔솔가지 사이에 부친이 숨겨 놓았던 병풍을 끄집어내어 불구덩이 속에 던져버렸다. 난초·석류 그림에다 기명도·책가도가 그려진 귀한 병풍이 불길에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이 송영숙의 기억에 생생하다. 대판 싸움이 났고 부친은 잠시 집을 나갔다. 김천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다. 취미 때문에 부인을 힘들게 했던 부친의 장례식은 수많은 만장과 해군군악대가 선두를 선 김천시민장으로 치러졌다.

김천에서 중·고교를 다닐 무렵부터 송영숙은 서울의 오빠들을 자주 찾았다. 부모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마련한 집이 마포구 신수동에 있었다. 1966년, 송영숙은 숙명여대에 입학했다. 두 살 위의 넷째 오빠는 의대생으로 사진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오빠의 영향으로 송영숙도 사진과 가까워졌다. 2학년 생이 되어 숙명여대 사진반인 ‘숙미회’에 8기로 들어갔다. 숙미회 1기 선배로는 사진가 박영숙(1941~2025)이 있었다. 재미 화가 김테레사(1943~ )도 숙미회 선배였다. 카메라가 귀하고 비쌀 때였다. 2학년 때 산 미놀타가 첫 카메라였다. 아사히 펜탁스, 캐논, 니콘 등 점점 고급 기종으로 카메라를 바꾸어나갔다.

‘드럼 스캐닝’ 시도, 디지털 작업 문 열어
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 폴라로이드 위에 유채, 85x53㎜, 2025년. [사진 뮤지엄한미]
숙미회는 학교에 따로 암실을 갖고 있었다. 100피트 벌크 필름을 구해다 24컷, 36컷 길이로 잘라서 빈 필름 통에 말아 넣는 마끼 작업을 배웠다. 인화지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을 쓰기도 했다. 숙미회는 사진가 주명덕(1940~ )의 지도를 받았다. 1969년 무렵 주명덕의 소개로 강운구(1941~ )를 알게 되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학년이 되자 처음으로 신문회관에서 열린 숙미회 그룹전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비싼 액자는 언감생심이고, 패널 위에 사진을 쭉 편 다음 호치키스로 고정하여 전시했다. 신문회관의 다른 전시장에서 전시하던 연로한 동양화가가 자신의 그림과 송영숙의 사진을 바꾸자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사진가의 사진을 수준급의 동양화가가 알아주고 작품 교환을 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69년 둘째 오빠와 ‘남매전’을 을지로 삼풍상가의 새한사진살롱에서 했다. 오빠와 동생은 각각 다른 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송영숙은 성심학교를 찾아가 촬영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시했다.

1972년, 약사로 나중에 큰 사업가가 된 임성기를 만나 결혼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사진 작업이 소홀해졌다. 1978년부터 작업 과정이 간단한 폴라로이드 작업을 했다. 폴라로이드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식 사진 작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였다. 1981년 주명덕과 함께 삼선교의 박고석(1917~2002) 화실을 찾아갔다. 두 마리의 꽁치를 다른 시점에서 찍은 두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박고석은 ‘꽁치’ 이면화(Diptych) 사진을 보더니 “눈이 참 좋아. 사진을 안 하면 벌 받지”라고 말했다. 짧은 한마디가 큰 용기를 주었다. 그날 이후로 박고석 가족과 인연이 이어졌다. 1983년에는 박고석의 장남 박기태가 관여하던 ‘공간’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암실 작업을 할 실력이 안 되기에 폴라로이드 작업을 한다는 혹평이 간간이 들려왔다.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1984년에는 전국을 다니며 방앗간·담배건조장·정미소 등 헐빈하고 휑한 공간을 찾아 흑백으로 촬영하고 인화하여 파인힐갤러리에서 전시했다. 개인 암실은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으로부터 해방된 1990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주택 지하실에 차릴 수가 있었다.

송영숙은 디지털 작업을 선도적으로 한 사진작가다. 1996년, 국내에서 드럼 스캐닝을 할 수 있는 회사는 세 군데밖에 없었다. 충무로의 대도플러스를 찾아갔다. 뉴욕에서 공부한 박기준이 도움을 주었다. 박고석의 차남으로 건축가인 박기준은 컴퓨터, 디지털 편집 등에 최고의 전문가였다. 폴라로이드 작업을 고해상도로 드럼 스캔한 후 포토샵에서 색 보정을 한다. 이를 CMYK 변환을 하여 필름으로 출력하거나 IRIS 프린트를 한다. 최종적으로 인쇄소에서 고급 판화지인 ‘아르쉬’에다 프린팅했다.

당시는 요즘과 같은 하드 디스크가 없었다. 640 메가바이트까지 나오는 파일을 MO 디스크에 저장하였는데 디스크의 가격이 800만원에 이르렀다. 스캐닝을 하나 하는데 20만원에서 50만원 정도 들었다. 광고업자들만이 이 기법을 이용했다. 송영숙은 미지의 영역에 도전했다. 이 방식으로 제작된 디지털 사진 작업으로 1998년,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인화지 프린팅이란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던 당시로써는 사진가들 사이에서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98년,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조각공원에 서울올림픽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관장은 미술평론가 이경성이었다. 큰길 건너는 한미약품의 본사 한미빌딩이다. 송영숙은 갤러리사간에서 열리는 개인전 서문을 이경성에게 맡겼다. 그게 인연이 되었다. 이경성은 한미빌딩 내에 공간을 하나 내어 사진미술관을 열 것을 권했다. 송영숙이 한미약품의 회장인 남편에게 그 뜻을 전한 6개월 후, 미술관 건립작업이 착수되었다. 갤러리 운영, 재단 설립 등 여러 과정을 거친 후 2003년,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했다.

이응노와 부친의 인연은 딸에게로 이어졌다. 이응노는 1972년 베네치아에서 개인전을 연 적이 있었다. 이 작품들을 한미문화예술재단이 구입하여 국내로 반입했다. 2009년, 한미사진미술관은 이 작품들을 전시했다. 2022년, 재단 설립 20주년을 맞아 종로구 삼청동에 첨단 사진 수장시설을 갖춘 미술관을 신축했고, ‘뮤지엄한미’로 명칭을 바꿨다.

해외서 이응노 작품 사들여 국내 전시
왼쪽부터 천경우, 주명덕, 송영숙, 강운구, 구본창, 2020년. [사진 뮤지엄한미]
뮤지엄한미 수장고에 있는 최고(最古)의 작품은 1846년 작이다. 유리건판 사진 등 문화재급 앤틱 사진이 수두룩하다.

4개의 수장고는 영상 5도와 영상 15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찾는 방식을 응용하여 사진 컬렉션을 찾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독일에서 기기를 들여왔다. 선진적인 수장고 시스템을 견학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미술관 관계자들이 뮤지엄한미를 찾아오고 있다.

최근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의 타이틀은 ‘메디테이션 온 더 로드(Meditation on the Road) 길 위에서’다. 사진을 찍는 순간마다 흐르던 시간은 분절된다. 손쉬운 휴대폰 촬영과 함께 시간의 분절이 극도로 잦아지면서 사진이 담을 수 있는 기억의 두께 또한 극단적으로 얇아졌다. 그나마 동영상을 압축한 정지영상으로서의 그림이 기억의 두께를 두툼하게 돋아나게 한다. 송영숙은 명함 크기의 폴라로이드 원판 사진 위에 세필로 유화물감을 얹힌다. 붓질마다 액상의 기억이 부풀어 오른다. 이를 다시 확대하고 보정하여 큰 사진으로 만든다. 사진과 그림, 그리고 다시 사진을 오가는 되먹임 작업이다.

공간은 공과 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 역시 시와 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間)이라고 하는 마디마디의 사이가 없으면 공은 그냥 공으로 흩어져버리고 시는 그냥 시로 흘러가 버린다. 명상은 반복적 의식이다. 의식(리추얼)은 시간의 마디 사이에 끼어 있는 찰나를 포착하여 이를 최대한 길게 늘임으로써 성립한다. 건조 속도가 느린 유화 물감은 시간마저 더디게 흐르게 한다. 카메라가 포착했던 짧은 순간은 한없이 길게 늘어지고 부풀면서 의식이 되고 명상이 된다. 순간이 곧 영원이 되는 지경,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면 송영숙의 사진이 그렇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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