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함 미카사, 러시아 발틱함대 완파에 딱 하루 걸렸다

2026. 4. 1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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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형의 해양시대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해군기지의 미카사 공원에 전시된 미카사함 전경. 러일 전쟁 승리의 상징으로 세계 3대 기념함 중 하나다. [사진 김진형]
일본은 청일 전쟁(1894~95) 승리로 대륙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지만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 간섭으로 바다에서 대륙으로 진입하는 진출로인 랴오둥반도를 내놓아야 했다. 이곳을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의 경쟁과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일본은 대륙 진출에 앞서 바다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결론을 더욱 굳혔다.

청일 전쟁은 일본이 근대화된 국가 역량과 해군력을 시험한 첫 대규모 전쟁이었다. 조선 지배권을 둘러싼 청일 경쟁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얻은 다른 의미는 “조선을 가지려면 황해와 동중국해의 제해권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전략을 학습했다는 데 있었다.

일본은 승리 후 곧바로 국제정치의 높은 벽과 마주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과 랴오둥반도를 차지했지만, 삼국 간섭으로 이를 일부 반환해야 했다. 더욱 치욕적이었던 것은 불과 3년 뒤 러시아가 바로 그 땅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1898년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와 뤼순항을 25년 조차했고, 뤼순항을 태평양 함대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일본이 피 흘려 얻어낸 전략 거점을 외교로 빼앗기고, 그 자리를 러시아가 차지한 셈이었다.

길이 131m 미카사함, 당시 최신 기술 집약
함교에서 내려다 본 미카사함 함포. [사진 김진형]
뤼순항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었다. 이곳은 부동항의 조건을 갖춘 최적의 해군기지였고,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황해를 동시에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는 뤼순항과 대련를 개발하고 철도망까지 연결해 만주 남부에 군사와 물류의 거점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는 일본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조선과 만주 방면에서 러시아의 지속적 남하가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으로 일본이 러시아와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배경이 되었다.

이 위협에 대응해 일본은 국가 생존과 대응 전략으로 해군력 증강을 최우선 상정했다.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근대식 전함과 순양함 중심의 함대 건설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식 조선기술과 해군 제도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청일 전쟁 이후에는 더 큰 전함과 중무장 함대를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둘째, 영국과의 전략적 연계이다. 1902년 영일 동맹은 중국과 조선에서 양국의 이해를 보호하는 협정이었고, 특히 러시아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는 의미가 강했다. 이 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와 맞설 때 외교적 고립을 피하게 해주었다. 셋째, 해군을 국가전략의 중심에 두는 사고방식이다. 일본은 대륙에서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 바다에서 러시아를 꺾어야 조선과 만주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러일 전쟁은 바로 이 국가 전략이 실제 전투로 옮겨진 전쟁이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 해군은 뤼순항을 봉쇄하고 러시아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나 외부 증원 세력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2월 10일 선전포고 이후 황해 해전과 쓰시마 해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일본은 러시아 해군의 작전 연결망을 끊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특히 쓰시마 해전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며 전쟁의 결말을 사실상 결정한 전투였다.

1905년 5월, 대한해협. 유럽에서 7개월을 항해해 온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단 하루 만에 바다에서 사라졌다. 그 중심에는 일본 사령관 도고 제독과 지휘함 ‘미카사(Mikasa)’가 있었다.

미카사함은 그동안 보아왔던 군함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의 최신 기술이 집약된 세계 최고 수준의 군함으로 1902년에 영국 비커스 조선소에서 건조했다. 배수량 1만5140t, 길이 131.7m, 폭 23.2m, 1만5000마력 엔진으로 최고 속력 약 18노트로 기동이 가능한 군함이었다. 무장은 주포 30.5㎝ 2개포 4문, 부포 15.2㎝ 한개포 14문과 7.6㎝ 한개포 20문 그리고 45.0㎝ 어뢰 발사관 4문을 장착했다. 선체는 배의 측면(현측)은 229㎜, 상부 갑판은 76㎜ 장갑(裝甲·적탄을 막기 위하여 배를 둘러싼 강철판)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지휘 통제를 위한 최신 통신·사격 통제 시스템을 갖추어 함대 지휘에 최적화된 군함이었다. 이 전함 미카사는 국가 전략, 산업력, 기술, 그리고 결단이 집약된 ‘떠다니는 제국의 상징’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카사함 위에서 함대를 지휘한 인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다. 그는 바다의 흐름을 알았고 전투의 법칙을 새로 만들었다. 도고 제독은 청년 장교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선진 해군의 군함 운용술과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 청일 전쟁 당시에는 순양함 ‘나니와’ 함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적의 머리를 자르면 몸은 무너진다”는 전쟁의 원칙을 알고 있었다. 함대를 러시아 함대 측면을 가로지르는 T자 전술(Crossing the T)을 구사하는 기동을 하면서 가장 먼저 러시아 함대 지휘함 ‘크냐지 수보로프(Knyaz Suvorov)’에 접근하여 집중적으로 함포를 퍼부었다. 싸움은 단순했다. 일본은 모든 함포를 집중해서 지휘함부터 차례로 쏘았고, 러시아 함대는 제대로 반격조차 못했다.

‘220일 운항’ 발틱함대 38척 순식간에 괴멸
쓰시마 해전에서 미카사함을 이끌며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도고 제독. [사진 위키피디아]
러시아 발틱함대는 북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전 세계를 거의 반 바퀴를 돌아 이동했다. 총 38척의 전투함과 수송선으로 구성된 함대는 약 220일 동안 2만9000㎞를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목, 한반도 남동쪽 바다에서 기다리는 것은 최신 군함으로 무장하고 숙달된 훈련을 통해 전투 준비를 마친 도고 제독의 함대였다. 두 함대가 맞붙은 결과는 무자비하고 참혹했다. 러시아 함대의 전함 대부분은 격침되고 수천 명이 전사했다.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단 하루 만에 바다에서 사라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치명적 피해 없이 승리했다. 해전의 승패는 전함의 성능만이 아니라, 지휘관의 리더십과 함대를 운용하는 지휘체계 그리고 장교와 승조원의 훈련 수준에서 갈렸다.

쓰시마 해전은 ‘전투’라기 보다 ‘처형’에 가까웠다. 그날, 한 번의 해전은 단순한 전투를 넘어 하나의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제국이 바다 위에서 탄생하는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가 바다를 잃은 순간, 제국도 무너졌다. 러시아는 육군 강국이었지만 바다에서 패배하자 모든 것을 잃었다. 극동에서 영향력은 상실되었고, 만주 전략의 붕괴는 러시아 내부 세력 분쟁으로 이어져 1905년에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켰다.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중재로 러일 전쟁을 종식하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러일 전쟁 승리 의미는 단순히 군사적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일본은 이 승리로 러시아의 동아시아 팽창을 저지했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국에 대한 우월권과 남만주 방면의 이권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고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을 러시아로부터 할양받았다. 그리고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러시아 연안 어업권을 일본에 부여했다. 미국 의회도서관 등 각종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이 전쟁의 결과 랴오둥반도와 뤼순항, 남만주 철도 남부 구간 같은 핵심 전략 지역과 자산을 획득함으로써 1912년 무렵부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즉, 중국과의 전쟁으로 일본이 국제무대에 등장했고, 러시아와의 전쟁 승리는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되었다.

개혁, 개방 이후 일본의 해군력 증강은 단순한 군비 확대가 아니었다. 청일 전쟁은 일본에게 해군의 효용을 증명했고, 삼국 간섭과 러시아의 뤼순항 점령은 해군 증강의 절박성을 각인시켰다. 러일 전쟁은 그 해군력이 동아시아 패권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시험장이었다. 결국 일본은 “대륙의 운명은 바다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했고, 그 이해를 전함 건조, 기술 축적, 기지 건설, 전술 개발 그리고 동맹 외교를 국가 생존과 경제 발전 전략으로 연결하며 해양력을 키웠다.

러일 전쟁의 일본 승리는 서양이 아닌 아시아 국가 최초로 유럽 강국을 바다에서 격파한 사건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은 이때부터 극동의 섬나라를 벗어나 유럽 제국과 대등한 해양제국으로 성장해 가면서 더 크고 먼바다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김진형 전 해군 제독. 해사 36기로 미국 육군 화학전학교 초급장교과정과 해군전쟁대학 지휘관 과정을 마쳤다. 합참 전략기획부장, 제1함대 사령관, 청와대 국가위기관리 센터장(비서관), 구축함(문무대왕함)과 초계함(제천함) 함장을 지냈다. 전 피지 및 남태평양5개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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