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게, 우아하게…무대를 뒤집다

유주현 2026. 4. 1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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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발레, 이색 승부
‘이제 아무도 관심 없는, 계속 살려내야만 하는 분야’. 얼마 전 할리웃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발레와 오페라를 두고 한 말인데, 적어도 한국에선 아주 틀렸다. 특히 발레는 한국에서 점점 핫해지고 있는 분야다. 지난해만 해도 공연시장에서 발레 매출이 전년 대비 22.8% 성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영국 로열 발레단과 미국 ABT가 서울에서 격돌한 영향도 있었다. 올해는 모던 발레의 메카 베자르 발레 로잔(BBL)과 또 다른 혁신의 아이콘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대전을 벌인다. 로열과 ABT가 무난한 갈라 형식으로 대결해 다소 싱거웠다면, BBL과 몬테카를로는 각자의 정체성이 담긴 대표작으로 승부하는 터라 올해 발레시장은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5년 만에 서울 공연에 나선 베자르 발레 로잔의 ‘볼레로’. [사진 베자르 발레 로잔]
“이번 생은 못 추는구나, 꿈을 접고 있었죠.” 한국 무용수 최초로 베자르의 ‘볼레로’ 주역을 맡은 발레리노 김기민의 말이다. 학생 때부터 ‘레전드 발레리노’ 조르주 돈의 영상을 보며 꿈을 품었고, 수년 전부터 세계 발레계 인사들에게 볼레로를 추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단다. 이번에 한국 공연기획사 인아츠가 BBL을 초청하면서 그 꿈이 이뤄지게 됐다. BBL의 내한(4월 23~26일 GS아트센터)은 2011년 대전 공연 이후 15년 만이자, 서울 공연은 2001년 이후 25년 만이다. 김기민은 “리허설을 해보니 지금이 볼레로를 추기 딱 좋은 시기다. 몇 년 전 했다면 큰 실수였을 것”이라고도 했다. ‘볼레로’가 대체 어떤 춤이길래 세계 발레의 최고봉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가 이런 말을 할까.

BBL·몬테카를로 발레단 대표작 승부
‘관능의 춤’이다. ‘발레 혁명가’로 불리는 프랑스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가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점층적 선율을 신체적 황홀경의 고양으로 치환한 춤이다. 라벨의 ‘볼레로’는 원래 발레곡이다. 1928년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작곡했는데, 캐스터네츠 리듬으로 반주하는 스페인 무곡 형식에 영감받아 명칭까지 그대로 따왔다. 그해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술집 테이블 위에서 홀로 춤추는 집시에게 구경꾼들이 점차 동화되는 스펙터클한 안무를 완성했고, 이 원형이 발레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 김기민. [사진 박귀섭 작가]
현재 원조로 통하는 건 베자르 버전(1961)이다. 아무 장식 없이 음악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무대라 파괴력이 크다. 붉은 원탁 위 솔로는 ‘멜로디’, 원탁을 둘러싼 군무는 ‘리듬’이라 부른다. 어둠 속에 조금씩 떠오르는 ‘멜로디’가 점점 강해지는 고동과 함께 ‘리듬’을 이끌어간다. 스네어드럼 솔로로 시작해 악기가 하나둘 더해지며 크레센도되는 음악의 빌드업을 독무가 점점 거대한 군무를 빨아들이는 춤으로 ‘동시통역’할 때 관객의 심장도 요동친다. 음악이 춤이 되고, 춤이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기민도 “음표가 우주에서 나에게 툭 떨어져서 내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해 눈물이 날 것 같고 소름도 돋는다”고 표현했다.

베자르 버전은 ‘20세기 남성 발레의 상징’이기도 하다. 남성 무용수를 여성의 보조자가 아닌 야성적 에너지의 주체로 해방시킨 것. 초연은 여성 주역이었으나 1979년 베자르의 페르소나였던 조르주 돈의 남성 버전이 탄생했고, 그의 춤이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에 박제되면서 남성 무용수의 근원적 에너지와 야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베자르 버전은 무용수들의 로망이자 안무가들의 오마주 대상이 됐고, ‘볼레로’ 음악이 15분마다 세계 어딘가에서 연주되는 이유가 됐다. 국내서도 국립현대무용단이 2017년 김보람·김용걸·김설진의 트리플빌 ‘쓰리 볼레로’를 기획해 화제였고, 일본에서는 배우로도 인기 높은 전통예능 교겐사(狂言師) 노무라 만사이의 ‘만사이 볼레로’가 유명하다. 베자르 ‘볼레로’가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다시 뜨길 기원하는 일본의 원시무용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宇受売命)’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착안, 2011년 3·11 대지진 당시 교겐의 ‘산바소(三番叟·신을 향해 오곡 풍요를 기원하는 춤)’로 재해석해 진혼과 재생의 메시지를 전한 것. 지난해엔 피겨 스타 하뉴 유즈루가 3·11 피해 지역의 회복과 평화를 기원하는 아이스쇼에서 ‘만사이 볼레로’와 콜라보를 추기도 했다. 베자르 볼레로가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는 ‘살아있는 고전’임을 방증한 사례다.

베자르가 1970년 안무한 ‘불새’. [사진 베자르 발레 로잔]
‘볼레로’만 오는 건 아니다. ‘불새’(1970)도 베자르 안무다. 모던 발레의 발상지로 불리는 발레 뤼스 원전(1910) 이래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맞춰 많은 거장들이 안무했지만, 베자르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붉은 유니타드의 주역이 잿빛 의상의 군무 속에서 스스로를 불태워 들불처럼 혁명을 일으키고 부활하는 불새가 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8분짜리 독무 ‘라 루나’(1984)는 세기의 무용수 실비 길렘에 의해 전 세계에서 공연된 베자르의 대표적인 솔로 레퍼토리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베자르가 중요한 건 귀족의 발레를 대중의 춤으로 변모시킨 혁명가였기 때문”이라며 1967년 아비뇽 축제에서 무용수들에게 청바지를 입힌 ‘현재를 위한 미사’, 퀸의 팝 음악에 맞춘 역동적인 동작으로 관객과의 교감을 극대화하고 지아니 베르사체의 무대와 의상으로 대중을 매료시킨 ‘삶을 위한 발레’(1997) 등을 언급했다. 베토벤 ‘합창’에 안무한 대작 ‘교향곡 9번’(1964)은 2019년에도 아테네 야외극장에서 1만여 관객에게 거대한 감동과 희망을 전하기도 했다.

아시아 초연작인 발렌티나 투르쿠 안무 ‘햄릿’과 요스트 브라우엔라에츠 안무 ‘바이 바이 베이비 블랙버드’는 베자르 철학을 계승한 BBL의 확장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막스 리히터, 뮤즈,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음악을 사용해 햄릿의 비극을 심리적 풍경으로 풀어낸 투르쿠는 작품 전반에 베자르의 영향이 스며있음을 고백한다. 장 평론가는 “베자르는 안무를 넘어 음악, 무대, 조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연출가였다”면서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같은 웅장한 스펙터클을 구현한 ‘1789…그리고 우리들’, 이분법적 구성이 돋보였던 ‘니진스키…신의 광대’ 등 인간의 심리와 시대적 서사를 극적으로 풀어내는 연극적 장치가 후배 안무가들에게 중요한 모델이 되면서 모던 발레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했다.

한국 무용수 김기민·안재용 활약 주목
BBL이 ‘혁명가’의 안무철학을 계승한 신작들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면, 모나코 몬테 카를로 발레단은 고전에 파격적 설정을 수혈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단체다. 모나코를 거점으로 삼았던 발레 뤼스의 적자(嫡子)를 자처하고 있는데, 1993년부터 이끌고 있는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클래식을 현대적 언어로 재조립하는 신고전주의 서사 발레로 동시대 발레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5월 내한하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사진 몬테카를로 발레단]
2019년 내한한 ‘신데렐라’, 2023년 내한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미니멀리즘의 극치로 호평받았고, 이번에 대표작인 ‘백조의 호수(LAC·2011)’(5월 13일 화성예술의전당, 16~17일 예술의전당, 20일 대전예술의전당)로 돌아온다. 올해는 국내 발레계 양대 산맥 국립발레단(4월)과 유니버설발레단(8월)도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3파전 양상이지만, 국내 발레단이 따르고 있는 러시아 볼쇼이와 마린스키의 클래식 버전과 마이요 버전은 전혀 다르다. 매튜 본의 남자 백조, 마츠 에크의 대머리 백조 등 기존에도 파격적인 백조가 있었지만, 공쿠르상 수상 작가 장 루오가 각색한 스토리와 영화적 연출을 더한 마이요의 백조는 동화와 서정성을 싹 걷어낸 ‘잔혹 심리 스릴러’다.
‘백조의 호수’에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밤의 여왕’과 ‘어둠의 대천사들’. [사진 몬테카를로 발레단]
불륜과 납치, 근친애 등 키워드도 화끈한데, 가디언은 “드라마틱하고 섹시하며 무섭기까지 하다”고 평했다. 흑조를 왕과 ‘밤의 여왕’ 사이에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설정한 것이 ‘킥’이다. 왕에게 배신당한 밤의 여왕의 복수로 지크프리트 왕자가 이복누이 흑조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막장드라마’. 무대를 지배하는 것도 왕자와 공주가 아닌 밤의 여왕이다. 클래식 버전의 악마 로트바르트를 대체하는 캐릭터로, 초연 당시 마이요의 페르소나였던 베르니스 코피에테르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중년의 무용수가 씬스틸러를 뛰어넘어 전막 발레의 중심을 차지한 것인데, 남성 2인조 ‘어둠의 대천사들’과 함께 공격적인 춤으로 무대를 휘저을 땐 걸크러시의 진수다.

사납게 포효하는 순간마저 아름답다는 게 발레의 아이러니. 마이요 안무를 관통하는 핵심은 정형화된 기술과 이상화된 아름다움의 나열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 몸의 육체성과 관능성에 있다.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발레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고 세련된 표현이 한가득이다. 백조 군무도 매튜 본의 남자 백조만큼이나 야성적으로 새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마이요 안무는 무용수가 짜여진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듯 보이는 게 큰 장점”이라며 “고전적인 테크닉을 사용하되 날카롭고 시원하게 질러서 쾌감을 준다. 춤과 연기를 어색하지 않게 넘나드는 것도 동시대 관객이 좋아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몬테카를로 수석무용수 안재용. [사진 김윤식 작가]
발레리노 안재용을 어떻게 기용할지도 관심거리다. 마이요는 2016년 한국인 최초로 입단해 3년 만에 수석무용수로 초고속 승급한 안재용에 대해 “내가 만든 캐릭터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인재”라고 평하면서도 내한 공연에선 ‘신데렐라’의 아버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티볼트로 기용했었다. 과연 이번엔 지크프리트 왕자가 될 수 있을까. 무용수 컨디션을 꼼꼼히 체크하는 마이요는 캐스팅을 공연 2~3일 전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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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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