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게, 우아하게…무대를 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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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발레, 이색 승부
‘이제 아무도 관심 없는, 계속 살려내야만 하는 분야’. 얼마 전 할리웃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발레와 오페라를 두고 한 말인데, 적어도 한국에선 아주 틀렸다. 특히 발레는 한국에서 점점 핫해지고 있는 분야다. 지난해만 해도 공연시장에서 발레 매출이 전년 대비 22.8% 성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영국 로열 발레단과 미국 ABT가 서울에서 격돌한 영향도 있었다. 올해는 모던 발레의 메카 베자르 발레 로잔(BBL)과 또 다른 혁신의 아이콘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이 대전을 벌인다. 로열과 ABT가 무난한 갈라 형식으로 대결해 다소 싱거웠다면, BBL과 몬테카를로는 각자의 정체성이 담긴 대표작으로 승부하는 터라 올해 발레시장은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5년 만에 서울 공연에 나선 베자르 발레 로잔의 ‘볼레로’. [사진 베자르 발레 로잔]](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1054lhcw.jpg)
BBL·몬테카를로 발레단 대표작 승부
‘관능의 춤’이다. ‘발레 혁명가’로 불리는 프랑스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가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점층적 선율을 신체적 황홀경의 고양으로 치환한 춤이다. 라벨의 ‘볼레로’는 원래 발레곡이다. 1928년 발레리나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작곡했는데, 캐스터네츠 리듬으로 반주하는 스페인 무곡 형식에 영감받아 명칭까지 그대로 따왔다. 그해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술집 테이블 위에서 홀로 춤추는 집시에게 구경꾼들이 점차 동화되는 스펙터클한 안무를 완성했고, 이 원형이 발레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 김기민. [사진 박귀섭 작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2327qbix.jpg)
베자르 버전은 ‘20세기 남성 발레의 상징’이기도 하다. 남성 무용수를 여성의 보조자가 아닌 야성적 에너지의 주체로 해방시킨 것. 초연은 여성 주역이었으나 1979년 베자르의 페르소나였던 조르주 돈의 남성 버전이 탄생했고, 그의 춤이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에 박제되면서 남성 무용수의 근원적 에너지와 야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베자르 버전은 무용수들의 로망이자 안무가들의 오마주 대상이 됐고, ‘볼레로’ 음악이 15분마다 세계 어딘가에서 연주되는 이유가 됐다. 국내서도 국립현대무용단이 2017년 김보람·김용걸·김설진의 트리플빌 ‘쓰리 볼레로’를 기획해 화제였고, 일본에서는 배우로도 인기 높은 전통예능 교겐사(狂言師) 노무라 만사이의 ‘만사이 볼레로’가 유명하다. 베자르 ‘볼레로’가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다시 뜨길 기원하는 일본의 원시무용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宇受売命)’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착안, 2011년 3·11 대지진 당시 교겐의 ‘산바소(三番叟·신을 향해 오곡 풍요를 기원하는 춤)’로 재해석해 진혼과 재생의 메시지를 전한 것. 지난해엔 피겨 스타 하뉴 유즈루가 3·11 피해 지역의 회복과 평화를 기원하는 아이스쇼에서 ‘만사이 볼레로’와 콜라보를 추기도 했다. 베자르 볼레로가 한계를 모르고 확장되는 ‘살아있는 고전’임을 방증한 사례다.
![베자르가 1970년 안무한 ‘불새’. [사진 베자르 발레 로잔]](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3589lctr.jpg)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베자르가 중요한 건 귀족의 발레를 대중의 춤으로 변모시킨 혁명가였기 때문”이라며 1967년 아비뇽 축제에서 무용수들에게 청바지를 입힌 ‘현재를 위한 미사’, 퀸의 팝 음악에 맞춘 역동적인 동작으로 관객과의 교감을 극대화하고 지아니 베르사체의 무대와 의상으로 대중을 매료시킨 ‘삶을 위한 발레’(1997) 등을 언급했다. 베토벤 ‘합창’에 안무한 대작 ‘교향곡 9번’(1964)은 2019년에도 아테네 야외극장에서 1만여 관객에게 거대한 감동과 희망을 전하기도 했다.
아시아 초연작인 발렌티나 투르쿠 안무 ‘햄릿’과 요스트 브라우엔라에츠 안무 ‘바이 바이 베이비 블랙버드’는 베자르 철학을 계승한 BBL의 확장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특히 막스 리히터, 뮤즈,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음악을 사용해 햄릿의 비극을 심리적 풍경으로 풀어낸 투르쿠는 작품 전반에 베자르의 영향이 스며있음을 고백한다. 장 평론가는 “베자르는 안무를 넘어 음악, 무대, 조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연출가였다”면서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같은 웅장한 스펙터클을 구현한 ‘1789…그리고 우리들’, 이분법적 구성이 돋보였던 ‘니진스키…신의 광대’ 등 인간의 심리와 시대적 서사를 극적으로 풀어내는 연극적 장치가 후배 안무가들에게 중요한 모델이 되면서 모던 발레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했다.
한국 무용수 김기민·안재용 활약 주목
BBL이 ‘혁명가’의 안무철학을 계승한 신작들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면, 모나코 몬테 카를로 발레단은 고전에 파격적 설정을 수혈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단체다. 모나코를 거점으로 삼았던 발레 뤼스의 적자(嫡子)를 자처하고 있는데, 1993년부터 이끌고 있는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클래식을 현대적 언어로 재조립하는 신고전주의 서사 발레로 동시대 발레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5월 내한하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사진 몬테카를로 발레단]](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5649lkcj.jpg)
![‘백조의 호수’에서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밤의 여왕’과 ‘어둠의 대천사들’. [사진 몬테카를로 발레단]](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7086dzqw.jpg)
사납게 포효하는 순간마저 아름답다는 게 발레의 아이러니. 마이요 안무를 관통하는 핵심은 정형화된 기술과 이상화된 아름다움의 나열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 몸의 육체성과 관능성에 있다.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발레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고 세련된 표현이 한가득이다. 백조 군무도 매튜 본의 남자 백조만큼이나 야성적으로 새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마이요 안무는 무용수가 짜여진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듯 보이는 게 큰 장점”이라며 “고전적인 테크닉을 사용하되 날카롭고 시원하게 질러서 쾌감을 준다. 춤과 연기를 어색하지 않게 넘나드는 것도 동시대 관객이 좋아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몬테카를로 수석무용수 안재용. [사진 김윤식 작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8/joongangsunday/20260418000358390ywjb.jpg)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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