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라 믿고 기댔는데” 13세 소년 끌고가 감금…의문의 실종, 지금도 행방묘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5세 편]

이원율 2026. 4. 17. 23:5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6 역사편. 에드워드 5세
열세 살에 왕좌로 오르게 된 소년
보호자 숙부 배신에 런던 탑 갇혀
복잡한 가문·세력 사이 장미전쟁
재위 기간 고작 2개월 반에 그쳐
곧 실종…소년왕은 희생양이었다
존 애버렛 밀레이, 탑 속의 왕자들(일부 확대), 1878, 캔버스에 유채, 147.2x91.4cm, 로열 할로웨이 컬렉션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가문과 세력, 공포와 야망 사이 빚어진 소년 왕 에드워드 5세의 비극을 장미전쟁 흐름에 맞춰 따라가봅니다. 최대한 간소화했지만, 그래도 등장인물이 꽤 많고… 깁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갇힌 런던탑에서의 기도
존 에버렛 밀레이, 탑 속의 왕자들, 1878, 캔버스에 유채, 147.2x91.4cm, 로열 할로웨이 컬렉션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5세가 문장을 읊었다. 이는 매일 밤 되뇌는 기도문이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살아남았다. 에드워드 5세가 숨을 재차 들이쉬는 순간, 침실 밖에서 묘한 소리가 울렸다. 이는 열린 창문을 타고 몰아치는 바람일 수 있었다. 성벽을 쪼는 까마귀, 길 잃은 고양이의 기척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는 짚을 수 있는 선택지가 무한하게 많아졌다. 그중 최악은 역시나 자객.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우리를 제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에드워드 5세와 같은 방을 쓰는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슈루즈베리)는 벌써 그 상황을 상상한 듯 몸을 움츠렸다. 형의 말을 더듬더듬 따라 하고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끅끅 참는 모습이었다.

1483년의 어느 날, 런던의 런던탑(Tower of London).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는 이곳에 갇혀 있었다. 둘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 그리고 열 살이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못했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왕과 공작 본인들조차 모르지 않았다. 우리 둘은 이 탑에서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을. 이대로 감금돼 살면서, 평생을 암살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에드워드 5세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다음 문장을 붙이지 못하고 심호흡만 했다. 실은 그도 동생과 같은 마음이었다. 문으로 차츰 다가오는 이 소리가 두려웠다. 그것이 점점 더 녹과 쇠 같은 둔탁한 음을 낸다는 점에서 숨까지 막혔다. “한 나라의 국왕이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이를 본 백성은 더욱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 5세는 과거 제왕 수업의 가르침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는 왕이기에 앞서 앳된 소년일 뿐이었다.
폴 들라로슈, 에드워드의 아이들(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1830, 캔버스에 유채, 181x215cm, 루브르 박물관

<에드워드의 아이들>은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가 당시 상황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다.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 둘은 침대 위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 차림새는 경건하다. 가구와 천은 고풍스럽다. 눈처럼 흰 베개와 이불은 고결함 내지 순수함을 뜻하는 듯하다. 공간이 품은 분위기는 결코 고즈넉하지 못하다. 이들은 떨고 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눈동자는 겁 또는 체념의 감정만 안고 있을 뿐, 펼친 책 위로는 잠시도 시선을 두지 못한다. 강아지도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다. 나름대로 문 쪽을 향해보지만, 이미 두 귀와 한 줄기 꼬리는 상황에 굴복했다. 설령 자객이 들이닥친다고 한들, 꼬리 내린 이 동물에게 상황을 바꿀 힘은 없을 것이다.

고귀한 왕과 공작, 이에 앞서 아직 십 대 아이일 뿐인 둘은 왜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는가. 그들의 삶은 끝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가. 훗날 역사는 두 사람을 ‘사라진 아이들’이라는 수식어로 기록하게 되는데….

사원에서 출생한 왕자
왕이었던 아버지는 망명자 신세?
작자미상, 에드워드 5세의 초상화,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소년 왕 에드워드 5세는 1470년 11월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에드워드 4세.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초대 국왕을 지낸 자였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다. 당시 시선으로는 다소 모호한 신분에서 왕비까지 오른, 나름의 이례적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에드워드 5세는 이들 사이 첫아들이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아버지에 이어 바로 국왕에 오를 수도 있을 고귀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궁전이 아닌 사원에서 세상 빛을 봤는가. 그곳은 당시 그와 그의 어머니가 사실상 대피소로 삼은 장소였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이 사정부터 따져봐야 한다.

그 무렵 아버지 에드워드 4세는 네덜란드 일대를 떠돌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잉글랜드 왕좌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구체적으로는, 그곳에서 쫓겨난 망명자 신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내전, 이른바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때문이었다.

요크家 vs. 랭커스터家
욕망과 광기의 ‘장미 전쟁’
작자미상, 에드워드 4세, 1540년경, 패널에 유채, 33x27.3cm,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장미 전쟁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요크가(家)랭커스터가가 맞붙은 사건을 뜻한다.

요크가가 흰 장미, 랭커스터가가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삼았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간은 보통 1455년부터 30년가량으로 잡는다.

전쟁은 요크 공작 리처드(플랜태저넷·1411~1460)가 당시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국왕 헨리 6세에 맞서 반기를 든 것으로 시작한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장남 에드워드가 뒤를 이어 왕좌를 빼앗기에 성공한다.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직전의 왕, 그러니까 자기 자리를 넘긴 헨리 6세는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는 에드워드 4세에게 맥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이것이 1461년까지의 일이었다. 소년 왕 에드워드 5세가 태어나기까지 아직 9년쯤이 남은 상황이었다.

작자미상, 엘리자베스 우드빌, 1500년 이후, 퀸스 칼리지
작자미상,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식, 15세기경 [장 드 와브랭의 ‘영국 고대 연대기’에 실린 삽화]

새로운 왕조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4세는 서둘러 힘을 키웠다. 본인의 영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행보였다.

에드워드 4세는 1464년, 스물두 살 나이로 일단 결혼부터 한다. 그 상대가 다섯 살 연상의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둘의 만남은 높으신 국왕과 다소 애매한 위치의 여인 사이 파격적 결합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에게는 그래도 명문 룩셈부르크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반면, 그녀의 아버지는 공작 아래 시종무관 출신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의 만남은 신분 따위 뛰어넘은 낭만적 행보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에드워드 4세가 일부러 ‘만만한’ 가문을 골랐을 가능성도 본다. 나름 이름값은 있지만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집안의 구성원으로 자기 세력을 불리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그때부터 아내 엘리자베스의 가문, 우드빌의 집안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행보를 보였다. 이들에게 드넓은 영지를 안기기도 했다.

작자미상, ‘킹메이커’ 워릭 백작, 17세기경

그런 에드워드 4세의 움직임에 격분한 이가 있었다.

네빌가의 제16대 워릭 백작(리처드 네빌).별명은 ‘킹메이커’였다. 에드워드 4세가 지금껏 신세를 진 권신(權臣)이었다.

원래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쪽 유력 가문을 혼인으로 묶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권력의 판을 한 번 더 키울 마음이었다. 이미 양측 사이 말도 오갔다. 대강 합의도 봤다. 이제 서로 반지만 주고받으면 끝일 듯보였다. 이 와중에 왕이 자기 몰래, 웬 무력해보이는 집안과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작자미상, 헨리 6세(추정), 1540년경, 패널에 유채, 31.8x25.4cm,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워릭 백작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는 눈치가 빨랐다. 상상력도 풍부했다. 이 모든 게 본인을 견제하기 위한의 술수일 수 있다는 계산을 마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돌고 돌아 직전 왕이었던 헨리 6세의 랭커스터 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다.

과연 킹메이커는 킹메이커였다. 워릭 백작은 몇 차례 전투와 암투 끝에 헨리 6세를 다시 왕위에 올려버렸다. 에드워드 4세는 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등과 함께 맞섰지만, 결국은 그렇게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남편 에드워드 4세와 같이 빠져나가지 못한 엘리자베스. 그런 그녀가 택한 곳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었다. 그곳이 군대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성소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장미 전쟁의 한가운데. 훗날 소년왕이 되는 에드워드 5세는 딱 이 시점에 태어난 것이었다. 그의 손은 아직 작고 작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벌써부터 권력의 비정함이 깃들고 있었다.

왕위를 되찾은 왕
등 돌린 킹메이커를 제압하다
작자미상, 바넷 전투(삽화·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을 창으로 찌르고 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없었던 장면으로 통한다), 15세기 후반, 겐트 대학교 도서관

아버지 에드워드 4세가 역습에 나서 왕위를 되찾은 것. 어린 에드워드 5세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1471년. 쫓겨난 에드워드 4세는 1년도 안 돼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도시로 돌아왔다. 이들과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바넷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였다. 승자는 에드워드 4세였다. 워릭 백작은 전장에서 사망했다. 곧 이어진 전투에서는 그와 손을 잡은 랭커스터 세력 또한 사실상 궤멸당했다. 에드워드 4세의 대항마였지만, 많은 순간 무력하기 짝이 없던 헨리 6세 또한 그해에 목숨을 잃었다. 에드워드 4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 초대에 이어 2대 국왕으로 복위(復位)할 수 있었다. 당시 에드워드 5세는 아직 한 살이었다.

父에드워드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子에드워드 5세는 아직 소년이었다
조지 버튜, 왕관을 쓰고 예복을 입은 에드워드 5세, 1732, 웨일스 국립 도서관

한 살이라고 해도 왕족은 왕족이었다.

에드워드 5세는 그해 아버지 에드워드 4세에게 웨일스 왕자라는 직위를 받았다. 1473년, 세 살이 된 그때부터는 루들로우성에서 생활했다. 그곳은 런던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바로 앞에 산과 들, 그리고 테메강이 굽이쳐 흐르는 땅이었다. 에드워드 5세는 이곳에서 저명한 학자, 제2대 리버스 백작인 앤서니 우드빌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은 엄격한 제왕 수업으로 볼 수 있었다.

가령 에드워드 5세는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떠야 했다. 미사 후 아침 식사, 그리고 도덕과 예절 교육을 받았다. 해가 차오르기 전 일찍 점심을 먹은 뒤, 이어서 ‘덕, 지혜, 명예와 경배에 대한’ 두꺼운 책을 읽고 옮겨 썼다. 수학과 역사는 물론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도 다뤄야 했다. 나이가 조금 들어선 춤과 노래, 악기 연주, 승마와 궁술 등 예체능 교육도 더해졌다. 그다음 저녁 식사와 잠들기 전 기도. 오후 8시가 되면 침실의 커튼이 내려왔다. 마음 편히 둘 수 있는 순간이었다. “(…) 싸움꾼, 험담꾼, 도박꾼으로 만들지 말라.” 아버지 에드워드 4세의 요구였다.

그는 나이를 훨씬 뛰어넘는
우아하고 학구적인 면을 보입니다.

(…)

얼굴에는 매력이 있고,
인품에는 품위가 묻어나는 듯합니다.
이는 에드워드 5세를 지근거리에서 본 인사의 평이었다고 한다.
루카스 호렌보우트, 에드워드 4세(비만 단계가 감지되는 모습), 1520년경(1470~1475년경 원본을 바탕으로 한 사후 초상화)

모든 것은 아버지 에드워드 4세의 계획대로였다.

그가 일군 요크 왕조의 긍지는 에드워드 5세가 잘 받아 이어갈 것으로 보였다. 에드워드 4세가 할 일은 전쟁 여파로 어수선해진 나라의 기강을 최대한 다잡는 것밖에 없어보였다. 적당한 때에 직을 물려주면, 아들 세대부터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4세는 1483년 4월에 급사하고 말았다. 폭식과 폭음, 난잡한 여자관계에 따른 병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이는 아직 마흔한 살이었다. 에드워드 5세는 지금도 고작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는, 이처럼 민망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세속적 이유로 어그러지고 말았다.

리처드 3세,
친형과 닮고도 다른 야심가의 등장
작자미상, 리처드 3세, 16세기 후반, 패널에 유채, 63.8x47cm,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이쯤에서부터 역사의 조명등은 뜻밖 인물에게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

앞선 전장에서 에드워드 4세 옆자리로 슬쩍 등장했던 인물,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4세가 신뢰한 친동생이자, 에드워드 5세에게는 같은 피가 흐르는 숙부였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죽은 형의 유지를 받았다. 나의 아들이자 너의 조카, 앞으로는 요크 왕조 3대 국왕으로 모셔야 할 에드워드 5세의 보호자 역할을 해달라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그 말을 따르려는 듯보였다. 에드워드 5세가 교사 앤서니 우드빌 등과 함께 런던으로 서둘러 가는 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또한 그 행렬에 합류해 곧장 호위를 맡으려는 듯했다. 아무도 몰랐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갑자기 얼굴색을 바꿀 줄은. 에드워드 5세를 뺀 나머지 모든 이를 체포해 발을 묶어버릴 줄은. 그러니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어느덧 보호자가 아닌 납치범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이시여. 제 말만 믿으십시오. 그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하얗게 질린 에드워드 5세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에드워드 5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맥없이 끌려갈 수밖에. 이들은 런던으로 오기는 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의 방 한쪽에 넣었다. 이어, 곧 에드워드 5세의 친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까지 데려와 함께 밀어 넣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무시는 동안, 밖에서는 왕을 위한 대관식이 준비되고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대책 없는 허황된 말에 불과했다.

제임스 노스코트,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의 만남을 바라보는 리처드 3세, 1799, 캔버스에 유채, 178x137cm, 내셔널 트러스트

결과적으로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드워드 5세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았다.

외려 파괴자이자 파멸자로 책임을 다할 뿐이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쪽에서는 에드워드 5세는 뿌리가 불분명한 사생아일 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 에드워드 5세를 밀어내고, 정통성 있는 새 인물을 왕좌에 앉혀야 한다는 설파까지 나왔다.그게 누구인가. 본인이었다. 어차피 당장 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였다. 숙부를 믿은 순진한 에드워드 5세를 붙잡은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1483년 6월26일.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스스로 왕관을 썼다. 리처드 3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린 에드워드 5세는 그 전날에 모든 것을 잃었다. 재위 기간은 고작 2개월 반 정도였다. 그는 이제 런던탑에 갇힌, 힘없는 열세 살 아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리처드 3세(직전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왜 이런 짓을 벌였는가.

형 에드워드 4세의 믿음을 등진 채, 무슨 이유로 조카 가슴에 비수를 꽂았는가. 이것은 역사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물론 이유는 그저 야망 내지 권력욕일 수 있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이유가 가장 묵직한 동기로 작용하는 법이다.

순진한 조카를 배신하고
스스로 왕에 오른 이유가?
데이비드 스콧,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아이들, 1826, 캔버스에 유채,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다만 당시 정치 구도를 되짚어보는 일도 의미가 없지는 않아보인다.

글로스터 공작 시절의 리처드 3세는, 형 에드워드 4세의 급사 후 곧장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수 있다. 우드빌 가문의 존재 때문이었다.

우드빌가는 과거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 직후부터 힘을 얻었다. 에드워드 4세 없이도 그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잠재적 경쟁자를 멀리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그런 우드빌가 입장에서 가장 눈엣가시는 리처드 3세(당시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였을 것이다. 심지어 에드워드 4세가 죽기 전, 우드빌가의 누구도 아닌 리처드 3세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긴 일 또한 전혀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드빌가는 에드워드 5세가 하루빨리 정식으로 대관식을 갖길 바랐으리라. 이후 리처드 3세의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체스판 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에드워드 4세가 세상을 등질 무렵, 리처드 3세는 일찌감치 본인이 처할 수 있는 최악 말로를 상상해봤다는 것. 즉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선공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 실제로 리처드 3세는 기민하고, 흐름을 읽는 이해력도 높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 어린 조카의 삶을 통째로 짓밟은 건 절대 정당화할 수 없지만.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누가 두 소년의 운명을 짓밟았을까
제임스 노스코트, 탑 속 왕자들의 살해, 1786, 캔버스에 유채, 178x137cm, 내셔널 트러스트

그날 밤, 에드워드 5세요크 공작 리처드를 괴롭힌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까마귀의 부리, 또는 고양이의 발소리였을까. 그게 아니면,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자객이지는 않았을지. 그해 7월13일. 에드워드 5세가 있는 런던탑을 오간 시종들이 잘렸다.

어린 왕은 자신이
희생을 위해 놓인 제물이라고 생각하는 듯,

이제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는 매일 고해성사를 했다.
마지막 급료를 받고 떠난 에드워드 5세의 의사는 이런 식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두 소년은 기도문을 몇 번이나 더 읊을 수 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에드워드 5세는 사라졌다. 요크 공작 리처드 또한 함께 모습을 감췄다. 그대로, 영영. 두 아이는 사라진 소년들이 돼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했다.

“믿고 기댄 삼촌에게 열세 살, 열 살 소년이 배신당해 증발했다”는 식의 말만 계속 이어질 뿐.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여전히 미스터리 영역에 있다.

리처드 3세가 계획을 마무리하고자 자객을 보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토마스 페넌트,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의 죽음(삽화), 1781

그런 한편, 우연과 광기가 빚은 장미전쟁은 런던탑 실종 사건 이후로도 잔불을 이어갔다.

이제는 리처드 3세가 요크 왕조의 구심점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옛 에드워드 4세 지지층, 그리고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우드빌 가문도 움직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랭커스터 계열의 방계 후계자로 볼 수 있는 헨리 튜더와 손을 잡았다. 리처드 3세 대 헨리 튜더. 요크 왕조튜더 가문으로 구도가 다시 짜이는 순간이었다. 최종 승자는 튜더였다.

1485년 8월 리처드 3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죽고, 그의 왕관을 헨리 튜더(훗날 튜더 왕조의 초대 국왕 헨리 7세로 등극)가 받아 쓴 순간. 근 30년간 이어진 ‘왕좌의 게임’도 끝을 맺었다. 이와 관련, 학계 일각에선 신세력 헨리 7세가 에드워드 5세요크 공작 리처드를 암살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두 소년 모두 살아있었다는 얘기인데…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테오도르 힐데브란트, 에드워드 4세 아들들의 살해, 1835, 캔버스에 유채, 150x175.2cm,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일부 발췌
만약 아버지 에드워드 4세가 몇 년만 더 살 수 있었다면, 함께 런던으로 향한 교사 앤서니 우드빌이 조금 더 경계심을 가졌다면, 대관식이 지체되지 않고 거행될 수 있었다면, 에드워드 5세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잉글랜드의 역사와 유럽 전역의 흐름 또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늘 그렇듯 삶과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것은 간교한 왕, 비겁한 귀족과 잔꾀 쓰는 신하에게도 유효하지만, 우아하고 순수했던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이는 두 소년의 종말이자, 도래할 법도 했던 또 다른 세계관의 종말이었다.
참고 자료

영국의 역사, 나종일·송규범, 한울아카데미

클래식 영국사, 박지향, 김영사

Richard III and the Princes in the Tower, Pollard, A. J., Alan Sutton Publishing

The Princes in the Tower, Weir, Alison, The Bodley Head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