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빈의 명산] 도파민과 저혈당 사이에서

최예빈 기자(yb12@mk.co.kr) 2026. 4. 1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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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하러 가기 위해 새벽 버스를 타기 직전, 미국 주식 하나를 샀다.

등산이 취미인 나에게는 가볍게 여길 만한 높이였다.

도파민 덕인지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도파민이 잔뜩 올라 있던 그날, 나를 구한 건 장대 양봉이 아니라 초코바 하나와 젤리 몇 알,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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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빈 경제부 기자

등산하러 가기 위해 새벽 버스를 타기 직전, 미국 주식 하나를 샀다. 사자마자 10%가 넘게 올랐다. 도파민이 폭발하는 감각이었다. 이런 날은 잠이 올 리 없었다. 버스 안에서도 주가 창을 연신 들여다봤다.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흥분한 몸은 그것을 피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버스는 3시간 넘게 달려 남해 금산에 닿았다. 도착하니까 새벽 4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남해 금산은 해발 705m에 불과하다. 등산이 취미인 나에게는 가볍게 여길 만한 높이였다. 워밍업도 짧게 끝냈다. 도파민 덕인지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힘든 줄도 몰랐다. 슉슉, 가벼운 발걸음으로 잘도 올랐다.

중턱쯤 올랐을 때였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오르려는데 속이 이상했다. 팔다리가 가늘게 덜덜 떨리는 느낌이 났다. 술 마신 것처럼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결국 등산로를 벗어나 토했다. 나온 건 물뿐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전날 저녁 6시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12시간 공복에, 한숨도 못 잔 채로 산에 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겪어본 저혈당 증세였다. 등산을 꽤 해왔지만, 그날처럼 힘겹게 정상을 향해 걸은 적이 없었다. 새벽에 비까지 쏟아진 터라 멈추는 것보다 계속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작은 간식거리도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한 발씩 천천히 내딛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705m짜리 산이, 그날만큼은 히말라야처럼 느껴졌다.

정상에는 보리암이 있었다. 보리암 처마 밑 툇마루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워 일출을 맞았다. 해무가 낮게 깔린 남해가 수묵화 같은 자태를 뽐내며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 쓰러져가는 몸으로 새삼 실감했다.

한참을 누워 있으니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져온 초코바와 젤리를 천천히 먹었다. 몸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아기 고양이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곁에 자리를 잡았다. 손에 든 간식을 노린 게 뻔했지만, 힘들어하던 내 옆에 그렇게 붙어 있어줘서 괜히 고마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곁에 있어주는 존재가, 그 순간에는 꽤 큰 위로가 됐다.

에너지가 돌자 하산은 가뿐했다. 아래에서 먹은 멸치쌈밥은 꿀맛이었다. 살면서 밥이 그렇게 간절하게 먹고 싶었던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배가 고파야 밥맛을 안다는 말이 새삼 실감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날 나는 두 가지를 얕봤다. 하나는 산이었고, 하나는 내 몸이었다. 주식이 올랐다는 흥분감이 피로와 공복을 덮어버렸다. 도파민은 훌륭한 마취제였다. 문제는 마취가 풀리는 건 항상 정신이 든 뒤라는 것이다.

705m짜리 산에서 나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높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방심한 것이 문제였다. 낮아 보인다는 이유로 방심할 때, 그 낮음이 가장 크게 돌아온다. 산도, 삶도 그런 것 같다. 대단해 보이는 것들보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더 크게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 잠 한 끼, 밥 한 끼. 그것을 건너뛰어도 괜찮다고 믿는 순간, 몸은 이미 한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도파민이 잔뜩 올라 있던 그날, 나를 구한 건 장대 양봉이 아니라 초코바 하나와 젤리 몇 알,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들이었다.

[최예빈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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