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화됐던 ‘가격 통제’ 수단, 중동발 에너지 위기에 부활[박상영의 경제본색](16)

중동발 에너지 위기와 고물가 파고 속에 이재명 정부가 사실상 사문화됐던 ‘석유 가격 상한제’와 ‘가격 재결정 명령’을 잇달아 소환했다.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강력한 권한인 ‘긴급재정경제명령’ 카드까지 테이블 위에 오르면서 시장 자율을 넘어선 정부의 강력한 직접 개입이 경제 운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정부는 지난 3월 13일 석유 판매가격 최고액 지정제도를 전면 시행했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에 근거한 이 제도는 유가가 급등락하거나 그럴 우려가 있으면 산업통상부 장관이 석유 판매가격의 상한 또는 하한을 설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며 초과 수익은 정부가 환수한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치 이후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이 제도를 정부가 다시 꺼내든 것은 중동 전쟁 여파로 일부 주유소가 하루 만에 리터당 200원 이상 가격을 올리는 등 ‘폭리’ 징후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국가적 어려움을 이용한 마귀 같은 행태”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규제 방침을 예고했다.
유가와 물가 상승 눈에 띄게 억제
지금까지 유가가 급등할 때마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 확대나 비축유 방출 같은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 초기부터 2주 단위로 정유사 공급가격에 상한을 설정하는 강도 높은 처방을 택했다.
효과는 어땠을까. 중동 전쟁 직전 배럴당 70달러 수준이었던 두바이유는 지난 3월 중순 169.75달러까지 치솟은 이후, 100달러 선을 줄곧 웃돌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0원을 넘지 않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두바이유가 100달러를 돌파하자 국내 휘발유 가격이 2000원을 넘어섰던 것과 비교하면, 가격 상승이 눈에 띄게 억제된 셈이다.
강기룡 재정경제부 차관보는 지난 4월 8일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 장관 태스크포스(TF) 브리핑에서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지 않았다면 2.2%였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까지 올라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약 20년 만에 가격 재결정 명령도 검토하고 있다. 단순히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과 달리, 담합으로 정해진 가격을 무효화하고 업체별로 가격을 다시 산정해 공정거래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인하 효과를 유도하는 제도다. 이 조치는 2006년 밀가루 담합 사건 이후 사실상 사용되지 않다가 최근 물가 불안이 커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실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시기와 맞물려 물가는 가공식품을 중심으로 올랐다. 한국은행 분석 결과, 2024년 11월부터 2025년 5월까지 6개월 동안 소비자물가를 구성하는 가공식품 73개 품목 중 52개 품목(71.2%)의 가격이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물가 상승률에서 가공식품의 기여도는 지난해 하반기 0.15%포인트에서 올해(1~5월) 0.34%포인트로 2배 이상 확대됐다.

기존 제재의 한계도 가격 재결정 명령이 주목받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공정위의 담합 조사부터 과징금 부과까지는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용 전가도 문제다. 기업들이 부과받은 과징금을 장기적으로 제품 가격에 반영해 사실상 소비자가 과징금을 대신 떠안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결국 정부가 ‘가격 재결정 명령’을 검토하는 것은 사후약방문식 처벌이 아니라 현재 형성된 부당한 가격 체계를 즉각적으로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공정위의 칼날이 설탕, 밀가루에 이어 전분당까지 가공식품에 두루 쓰이는 원재료 담합에 집중된 데다 가격 재결정 명령까지 검토되면서 지난 3월 가공식품 물가는 전년 대비 1.6% 오르는 데 그쳤다. 이는 2024년 11월(1.3%) 이후 1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상승 폭이다.
긴급재정경제명령 카드까지 언급
최근에는 이 대통령이 긴급재정경제명령까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월 31일 국무회의에서 “법 때문에 안 되는데 어떡하냐고 하지 말고, 현재의 제도나 법령의 제한을 극복할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며 “입법도 대체할 수 있는 긴급재정경제명령 제도가 헌법에 있지 않나”고 언급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 수급 위기가 고조되자 나온 발언이었다.
긴급재정경제명령은 국회 절차를 기다릴 여유가 없으면, 대통령이 재정·경제상의 처분이나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다만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 상황으로 한정하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강력한 권한인 긴급재정경제명령이 실제 발동될 경우 1993년 금융실명제 이후 약 33년 만의 사례가 된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기득권의 반발과 자금 이탈을 우려해 국회 협의 절차를 생략한 채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단행했다.
긴급재정경제명령 카드가 실제로 꺼내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현재의 경제 상황이 발동 요건인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굳이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시행하지 않아도 대통령 권한으로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는 물론, 석유화학제품 수출 금지와 매점매석 금지 등 다양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와대도 “관료들이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취지”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정부가 과거에 쓰지 않았던 비상적인 조치를 잇달아 검토하거나 시행하면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은 석유 판매가격 최고액 지정제도와 관련해 “단기적으로 가격 급등 억제와 소비자 부담 완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서도 “중·장기적으로는 공급 축소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제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정 부담이 커지는 점도 우려된다. 국제유가 상승분을 소비자 가격에 전가하지 못해 발생하는 정유사의 손실은 정부가 사후에 보전해줘야 한다. 정부는 6개월간 석유 판매가격 최고액 지정을 유지한다고 가정해 추가경정예산안을 통해 4조2000억원을 편성했지만, 국제 유가와 소비자 판매가격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재정 투입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위기 국면인 만큼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주요국들은 중동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유가 인상 횟수를 제한하거나 에너지 요금 상한제를 도입하고 있다. 정부의 강도 높은 비상 처방이 민생 안정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져 우리 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을지, 과도한 개입의 후유증으로 남게 될지 주목된다.
박상영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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