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퇴직연금 '기금화' 속도…국민연금 등판론에 설왕설래

최수진 기자 2026. 4. 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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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기금 300인 이하 확대에 국민연금 참여 가능성 제기
연금 3층구조 붕괴 우려…금투업계 "공적·사적연금 역할 달라"
[사진제공=국민연금공단]

정부가 추진 중인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입법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수탁 사업자로 국민연금(NPS) 등 대형 공공기관이 참여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민간 금융사 위주로 전개돼 온 500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에 국민연금이 뛰어들 경우 지각변동이 불가피한 만큼, 자본시장의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당정은 지난 2월 노사정 태스크포스(TF)에서 발표한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 공동 선언문'을 토대로 올해 안에 관련 입법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합의안의 핵심은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히기 위해 기존 계약형(DC·DB형) 제도를 유지하되, 다양한 유형의 기금형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다. 기금형 모델은 개별 기업이 금융사와 계약하는 방식을 넘어, 전문 기관이 여러 기업의 적립금을 모아 펀드 형태로 통합 운용하는 구조다. 크게 △금융기관 개방형 △사용자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 3가지로 나뉜다.

◆'푸른씨앗' 확대에 쏠린 눈…가입자는 NPS '수익률' 환영

시장이 국민연금의 진입을 점치는 배경에는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 모델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이 있다. 정부가 푸른씨앗의 가입 대상을 300인 이하 사업장까지 확대하기로 하면서, 수조원 단위의 자금을 굴릴 대형 공공 인프라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이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은 사실상 국민연금이 유일하다.

아직 국민연금의 시장 진입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가입자인 근로자들은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핵심 근거는 압도적인 운용 성과(수익률)다.

지난해 말 기준 500조원에 육박하는 국내 퇴직연금의 최근 10여 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2%대에 머물렀다. 반면, 국민연금의 기금 설정 이후 누적 연평균 수익률은 8% 수준이며, 작년 한 해에만 18.82%(잠정)의 높은 성과를 냈다. 또한, 연간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민간 금융사의 운용 및 자산관리 수수료 역시 국민연금의 거대 인프라를 활용하면 대폭 낮출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한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은퇴 자금인 만큼 원금 보존이 가장 중요하지만, 오랜 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내온 국민연금이 내 퇴직연금까지 굴려준다면 훨씬 든든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구름 낀 여의도 증권가 전경.[출처=연합]

◆금융권 '초긴장'…리스크 동조화·생태계 훼손 우려

민간 금융권은 거대 기금과의 경쟁에 따른 가입자 이탈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연금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황성엽 금융투자협회장이 최근 "국민연금이 퇴직연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은 역할이 다르다"고 선을 그은 것도 이러한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큰 우려는 리스크 동조화 현상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후 보장 시스템은 운용 주체와 방식을 분리해 위험을 분산하는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의 3층 구조로 설계돼 있다. 만약 국민연금이 퇴직연금까지 일괄 운용하게 되면, 특정 투자 전략이 실패하거나 거시 경제 충격이 발생할 경우 국민의 노후 자산 전체가 동시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운용 과부하와 관치 금융 논란도 무시할 수 없다. 이미 적립금 1100조원을 돌파한 국민연금에 500조원의 퇴직연금까지 더해지면 마땅한 투자처 발굴이 어려워져 수익률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나아가 막대한 사적 연금이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 자금이나 기업 지배구조 개입 수단으로 동원될 경우, 사적 연금 시장의 자율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국민연금이 실제 수탁 사업자로 등판할 경우, 민간 금융권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직면할 전망이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의존하며 수수료 수익을 올려온 은행과 생명보험사들의 타격이 불가피하며, 증권업계 역시 양극화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고도의 액티브 운용 역량을 입증한 소수 대형사만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올해 1분기 퇴직연금 신규 유입 자금 11.9조원 중 약 36.4%(4.3조원)가 자산운용에 강점을 지닌 미래에셋증권 1곳으로 쏠린 바 있다.

금융투자업계는 사적 연금의 자율성 확대를 우선순위로 요구하고 있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민간 금융사의 평균 수익률이 2%대로 낮아 보이는 것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며, 실적 배당형 상품은 이미 두 자릿수 성과를 내고 있다"며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 보장형을 제외하고, 70%로 묶인 연금 위험자산 투자 한도를 해제하는 등 민간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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