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이미 작동 중이다. 성장은 운영에서 갈린다 [김형렬의 공간산책]

2026. 4. 17. 11:1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삼성역 일대의 코엑스와 트레이드타워는 전시·컨벤션, 업무, 상업 기능이 결합된 대표적인 도심 복합지구다. GTX 개통과 국제업무지구 개발이 추진되며 교통·비즈니스·문화 기능이 결합된 서울형 도시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출처 : Seoul Institute / Wikimedia Commons]

드라마 「미생」을 떠올리면,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회의실도 승진 발표도 아니다. 말없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 장면이다. 같은 시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 시간의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이 도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과 활동을 조직하는 구조다. 문제는 이 구조가 지금도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이 도시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의 성장은 국가의 역사와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이후 산업 기반이 거의 소멸된 상황에서, 한국은 도시와 인프라를 성장의 도구로 선택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주거와 일자리를 묶고 도심과 외곽을 연결함으로써, 도시의 확장과 집적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 상징적 결과물이다.

그 성과는 수치와 제도로 모두 확인된다. 한국은 2009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며 공적개발원조(ODA) 공여국으로 전환했다. 이후 2017년 명목 기준 1인당 GDP 3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1인당 GDP는 수년째 3만 달러 구간에 머물러 있다. 환율이나 경기 변동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도시라는 성장 장치가 성숙 단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이유다.

이 지점에서 ‘도시의 재탄생’이라는 화두가 등장한다. 이는 더 많은 개발이나 더 큰 프로젝트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식이다. 도시를 다시 성장시키는 핵심은 물리적 확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공간과 인프라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있다. 5만 달러를 달성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산업의 종류보다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

일본의 사례는 도시 운영이 경제의 다음 단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은 고성장 이후의 정체를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도시가 가치를 축적하고 회전시키는 방식, 즉 도시 운영의 문제로 인식했다. 그 전환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 도쿄의 야마노테선(山手線)이다. 이 순환선에서 일본은 모든 역을 동일하게 키우기보다, 수요와 기능에 따라 역마다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하나의 운영 체계로 설계했다.

그중 신주쿠역은 이 운영 모델의 핵심을 보여준다. 세계 최대 규모의 환승 거점이지만, 철도와 상업·업무·숙박 기능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결합되며 이동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업무와 소비, 체류로 이어진다. 이는 규모가 커서 가능한 모델이 아니라, 운영을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에 규모가 성립한 사례다.

1885년 개통된 도쿄 신주쿠역은 하루 약 350만 명이 이용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도 허브다. 다수의 철도 노선과 상업·업무 시설이 결합되며 이동 흐름이 소비와 체류로 확장되는 도시 플랫폼 구조를 보여준다. [출처: MaedaAkihiko / Wikimedia Commons]

시부야역 역시 같은 철학 위에서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보행 동선과 공간 구조를 재편해 체류 시간을 늘리고, 상업·문화·업무 기능을 입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이동 수요를 도시 활동으로 전환했다. 역의 개선이 곧바로 지역 가치로 연결되도록 설계됐다는 점에서, 신주쿠와는 다른 운영 모델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JR East(동일본여객철도)가 열차 운행에 그치지 않고, 역사와 인접 자산의 개발·임대·운영까지 함께 책임지는 제도적 구조가 있다. 역을 개선할수록 성과가 동일한 주체에게 귀속되기에, 분양이 아닌 장기 운영 수익이 작동한다. 도쿄역이 역사 보존과 업무·상업 기능을 결합해 하나의 자산으로 운영되는 방식은 이러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도시 운영 방식은 일본만의 특수한 선택이 아니다. 유럽의 주요 선진국들 역시 1인당 GDP가 4만~5만 달러 구간에 진입하며 성장의 성격이 바뀌는 시점에서, 도시 내부의 교통 거점을 단순한 공공시설이 아닌 수익과 기능이 결합된 운영 단위로 재정의해 왔다.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역 인근의 그레너리 스퀘어는 과거 철도 화물 창고 지역을 공공광장과 문화·상업·업무 기능이 결합된 복합 도시 공간으로 재생한 대표 사례다. 역을 중심으로 유동 인구와 활동이 모이며 장기 운영형 도시재생 모델을 보여준다. [출처: Granary Square / Wikimedia Commons]

영국 런던의 킹스크로스역 일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과거 철도 화물과 창고 지역이었던 이곳은 역을 중심으로 업무·주거·문화·교육 기능을 단계적으로 결합하며 재생됐다. 개별 필지 개발이 아니라 역과 주변을 하나의 장기 운영 구역으로 묶어, 임대 수익과 유동 인구가 지역에 환류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의 레알역 역시 환승 거점을 이동 공간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지하 보행망을 중심으로 상업·문화·공공 공간을 결합해, 도심 한가운데에서 체류와 소비가 반복되는 구조를 형성했다. 역은 통과 지점이 아니라 목적지로 기능하게 됐다.

독일 베를린의 베를린 중앙역 또한 장거리·광역·도시 철도가 교차하는 복합 구조를 분절하지 않고, 업무·호텔·상업 기능을 역 중심으로 집약했다. 규모와 복잡성은 관리 부담이 아니라, 이동과 체류가 하나의 운영 체계 안에서 순환하도록 만드는 기반으로 작동했다.

베를린 중앙역은 2006년 개통된 독일 최대 규모의 철도 허브로, 장거리·지역·도시철도가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복합 교통 인프라다. 유리 구조의 대형 역사와 상업 공간이 결합되며 이동과 체류, 도시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는 유럽형 교통 거점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Yair Haklai / Wikimedia Commons]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성장은 새로운 랜드마크를 더 짓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교통 거점을 어떻게 운영 단위로 성립시키느냐에서 갈렸다. 개발의 성패는 ‘무엇을 지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구조로, 얼마나 오래 운영하는가’에 달려 있다.

서울에도 도쿄의 야마노테선에 비견되는 인프라가 있다. 바로 지하철 2호선이다. 강남역, 삼성역, 잠실역, 홍대입구역 등은 이미 서울을 대표하는 경제·상업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지하철 2호선은 한국 도시 성장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과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이들 지역의 성장은 역 자체가 하나의 사업 단위로 설계·운영된 결과라기보다, 역 주변 개별 필지 개발이 누적된 결과에 가깝다. 역은 공공 인프라로 분리돼 운영되고, 역사 상부와 인접 부지는 소유와 권한, 사업 주체가 나뉘어 있다. 이 구조는 도시가 성숙 단계에 접어든 지금, 역을 키운 성과가 다시 역으로 환류되지 않는 한계로 드러난다.

K-컬처의 확산은 이 구조적 한계를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한국을 찾고, 소비와 체류 의사도 분명하다. 최근 BTS 공연이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인파가 도심에 집중됐지만, 그 흐름은 주변 생활권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특정 공간에 머물렀다. 이는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유입된 수요를 분산·축적할 도시 운영 플랫폼이 부족하다는 신호다. 글로벌 수요는 이미 형성돼 있지만, 이를 순환시킬 공간 단위와 운영 주체는 여전히 부재하다.

이제 5만 달러를 향한 전략은 분명해진다. 더 큰 개발이 아니라, 운영 가능한 거점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과 상부·인접 공간을 하나의 사업 단위로 묶는 제도적 전환, 분양 중심에서 임대·운영 중심으로의 구조 재설계, 그리고 공공의 역할을 장기 운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요와 자본, 국제적 기능이 이미 집중된 삼성역은 이러한 전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시범 대상이다.

도시 사상가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의 성장을 ‘계획’이 아니라 ‘작동’의 문제로 보았다. 3만 달러는 도시를 키운 결과였다. 5만 달러는 도시를 운영할 수 있느냐의 시험이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더 지을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성장은 더 짓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도시를 ‘돌아가게 만드는가’에서 나온다. 이미 만들어진 도시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가. 그 결단이, 3만 달러 이후를 가르는 기준이다.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