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 등으로 자녀 6명 가슴에 묻고… 자신은 당뇨·요통·중풍 앓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6. 4. 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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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45) 왕의 인성과 사생활 - 세종편 (4)
18남 7녀 자녀 중 6명 먼저 보내
13세 장녀, 천연두로 사망… “세월 바뀌어도 슬픔 절실”
광평·평원대군 홍역으로 잃자 수라 중지하기도
이십대에 당뇨 시작… 유전적 영향 컸을듯
요통으로 다리 통증… 제대로 걷지 못하기도
재위 20년 건강문제로 정사 손 뗄 결심… 신하들 반대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가슴에 묻은 자녀들

세종은 18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들 중에서 왕비 심씨가 8남 2녀를 낳았고, 영빈 강씨가 1남, 신빈 김씨가 6남 2녀, 혜빈 양씨가 3남, 숙빈 이씨가 1녀, 상침 송씨가 1녀, 사기 차씨가 1녀를 낳았다. 이들 중에서 왕비 소생이자 장녀였던 정소공주가 일찍 죽었고,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리고 신빈 김씨 소생 옹주 2명이 어린 나이에 죽었고, 사기 차씨 소생의 옹주 1명도 일찍 죽었다. 이렇듯 세종은 6명의 자녀를 먼저 보냈는데, 이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흔히 먼저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세종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이 장녀 정소공주를 먼저 보낸 것은 재위 6년(1424년) 4월이었다. 당시 정소공주는 열세 살이었는데,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정소공주는 부부가 결혼한 지 4년 만에 얻은 첫아이였다. 당시 세종은 16세, 부인 심 씨는 18세였다. 대군의 딸로 자란 그녀는 일곱 살 때 궁궐로 들어와 공주가 되었고, 14세가 되면 계례를 올리고 시집을 보내기로 했었다. 그러나 계례를 한 해 남겨두고 죽으니, 세종 부부는 몹시 슬퍼했다. 정소공주가 죽고 2년 뒤인 1426년 4월 12일에 세종은 딸을 기리는 제문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장수와 단명에 운명이 있으니, 예로부터 피하기 어렵지만, 부녀간의 정은 언제나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데 어찌 삶과 죽음을 가지고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1424년)이었는데, 세월이 여러 번 바뀌매 느끼어 생각함이 더욱 더하도다. 이제 담제일이 닥쳐오매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며, 나이 어리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매 영원히 유명(幽明·저승과 이승)이 가로막혔도다. 이에 중관을 명하여 사실을 진술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노라. 아아, 제도는 비록 한정이 있지만 정에는 한정이 없도다. 영혼이여, 어둡지 않거든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지만 세종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 26년(1444년) 12월 7일에는 왕비 심 씨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홍역으로 죽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세종은 잠을 자지 않고 낫기를 염원했는데, 끝내 목숨이 끊어지자 절망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 그렇듯 광평을 잃은 슬픔이 다 가시기 전에 또다시 세종은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을 잃었다. 광평을 잃고 불과 한 달여 만이었다. 이때 평원의 나이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평원 역시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이에 세종이 또 수라를 중지하니, 의정부와 육조에서 수라 들기를 요청했다.

#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매우 건강했을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지만,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세종을 괴롭힌 질병을 나열해보면 우선 조선 왕들에게 가장 흔했던 종기는 늘 달고 살았고, 다음으로는 소갈증으로 불리던 당뇨병, 거기다 당뇨 합병증으로 발생한 눈병에 요통, 중풍까지 겪었다.

세종이 종기를 겪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다 동시에 여러 곳에 생겼다. 이 때문에 세종은 자못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세종의 종기는 치명적으로 악화되지는 않았다.

세종이 앓고 있던 질병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소갈증, 즉 당뇨였다. 세종이 당뇨를 본격적으로 앓은 것은 이십 대 말부터였다. 이십 대에 당뇨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유전적인 영향이 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소갈증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거기다 동시에 여러 병이 함께 생겼다. 물론 앞에서 말한 종기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은 재위 20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정사에서 손을 뗄 결심을 했다. 말하자면 세자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겨주려 한 것인데,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세자에게 서무결재권을 넘겨주면 졸지에 두 명의 왕을 섬기는 꼴이 되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로선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세종은 1439년 6월 21일에 자신이 여러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면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또 소갈증을 앓은 지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淋疾)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그로 인해 오른쪽 눈도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당시 세종이 열거한 병은 다리 통증, 종기, 소갈증, 임질, 안질 등이다. 세종은 젊어서부터 이미 다리 통증으로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요통과 관련 있는 듯하다.

세종이 앓은 병 중에는 대표적인 성병으로 알려진 임질도 있었다. 남성의 임질 증세는 대개 요도염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세종은 급성 요도염을 앓았던 듯하다. 당시 세종은 열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세종은 매우 왕성하게 성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러 후궁에게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임질은 아마도 그 과정에서 걸린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종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병마는 역시 소갈증, 즉 당뇨였다. 이 소갈증 때문에 세종은 하루에 몇 동이의 물을 마셔야 한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당뇨는 당뇨 그 자체보다도 합병증이 더 무서운 법인데, 세종에게도 합병증이 닥쳤다. 바로 눈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눈에 이상이 생기는 대표적인 병이 당뇨망막병증인데, 세종의 눈병은 아마도 이것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충청도 초정리까지 거동하여 탄산수에 눈을 씻어 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험이 없었다. 당시 의술로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했던 셈이다.

이런 여러 질병과 함께 세종은 풍습병까지 앓았다. 풍습병은 요즘 용어로는 딱히 마땅한 용어를 대입하기 힘들지만, 관절통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은 이렇듯 온갖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만년에는 중풍까지 걸리고 말았다. 여러 질병에 더해 중풍 증세까지 겹친 상태에서 세종은 재위 32년(1450년) 2월 17일,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에서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작가

■ 용어 설명 - 계례(筓禮)

조선시대와 같은 과거 왕조 시대에 여자아이들이 올리던 성인식을 뜻한다. 대개 여자아이가 15세가 넘으면 하는 의식인데, 머리에 비녀를 꽂아주는 형태였다. 남자아이들은 관례라는 의식을 행했다. 대개 상투를 틀고 갓을 씌우는 의식이다. 관례 의식은 주희가 지은 ‘가례’의 유입 이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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