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권 내면 물러나겠다던 그, 떠나지 못하는 이유 [.txt]
역사 전문 출판사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의 박혜숙 대표는 출판인 치고는 인터뷰를 많이 한 편이다. 역사서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 출판사를 안정적으로 꾸려 왔고 학계와 일반 독자들 양쪽으로부터 두루 호평을 들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았던 말이, 500권을 내면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푸른역사가 낸 책의 권수가 500을 넘긴 것이 벌써 여러해 전이고 지금은 어느덧 600권 안팎에 이를 것으로 박 대표 자신은 헤아린다.
“그때만 해도 500권을 낸다는 게 아득한 미래의 일로만 여겨지고 언제 그럴 때가 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었죠. 한권 두권 책을 내다 보니 어느새 500권이 넘어가 있더군요. 책을 만드는 일이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순수한 독자로 돌아가서 남이 잘 만든 책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난 8일 서울 서촌의 한옥으로 된 출판사에서 만난 박 대표는 ‘500권 출간=일선 후퇴’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대한 해명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득하게만 생각되던 ‘500권 출간 고지’를 훌쩍 넘겼고, 출판사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1996년 푸른숲 출판사의 자회사로 시작해 2000년에 1인 출판사로 독립했으며, 지금은 박 대표 자신을 포함해 정규직 직원 4명과 비정규 직원 2명이 연간 20종 남짓 신간을 내는 단출하지만 탄탄한 살림이다.

푸른역사의 책들은 언론사 출판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최근에 낸 ‘고서의 은밀한 매력’과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그리고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시리즈(전4권)는 약속이나 한 듯 호의적인 매체 서평을 받았다. 역사를 보는 참신한 시각,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울러 갖춘 필자들의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허투루 내지 않는다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시장 상황이 전 같지 않아서, 아무리 언론사 서평이 받쳐줘도 초판 1천부에 2쇄 500부가 나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 패턴이 굳어진 거죠.”
푸른역사를 시작했던 30년 전만 해도 상황이 이렇지는 않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 박 대표가 짧은 강사 시절과 3년 정도의 모색기, 정보서 전문 출판사 근무 6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김혜경 푸른숲 대표를 만났을 때, 김 대표는 당돌한 후배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다.
“그때도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죠. 다른 큰 출판사에서 좋은 제안을 했는데도 뿌리치고 역사 전문 출판을 하겠다고 나온 거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들을 할 때였는데, 저는 망해도 좋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거 해 보고 망해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첫 책 ‘새로 쓰는 백제사’(이도학)를 필두로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정도전을 위한 변명’(조유식) 등이 잇따라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역사서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우선은 제가 즐거웠어요.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그 세계를 대체할 만한 역사서가 없었고 내 눈높이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보자 해서 시작한 건데, 그때 저랑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동시대의 존재들이 있었던 거죠.”

푸른숲 자회사로 24권을 내고 2000년에 독립한 뒤에 푸른역사의 기세는 더한층 올라갔다. ‘미쳐야 미친다’(정민),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같은 베스트셀러가 연이어 나왔고 한때는 직원 12명에 역사가 아닌 문학서로 분야를 넓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세를 키우지 않는다’는 방침만은 놓지 않았다.
“제 신조가 ‘출판 시장에 휘둘리지 말자’입니다. 출판계 역시 트렌드가 있는데 제가 또 귀가 얇은 사람이라 자칫하면 흔들리기 십상이거든요. 베스트셀러가 나왔을 때가 출판사로서는 가장 위험한 때라고들 합니다. 유혹에 넘어가 출판사 규모를 키우다가 망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저는 어쩌다 출판계와 거리를 두다 보니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건 다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 그의 고민은 따로 있다. 출판 불황과 더불어 나날이 줄어드는 역사서 독자층, 그리고 서른살 푸른역사의 미래다.
“푸른역사 책의 독자는 저와 비슷한 연배들인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순을 넘기면서 하나둘 독자층에서 이탈하는데, 그 자리를 메꿀 젊은 독자의 유입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요즘 20~30대는 역사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고 그나마 관심이 있는 이도 책이 아니라 유튜브나 영상 같은 자극적인 콘텐츠로 소비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시장에서 구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게 그런 현상과 관련된 것 아닐까요.”
그렇게 까다로운 젊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고자 시도한 게 ‘여자, ㅇㅇ하다’ 시리즈다.
“역사학계가 보수적이어서 여성사는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출판 시장에서도 큰 재미를 보지 못했어요. ‘여자, ㅇㅇ하다’ 시리즈는 여자를 행위 주체자로 부각시켜 역사를 달리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다가가고자 서술도 편하고 재미있게 하고 책 부피도 얇게 만들었죠. 저로서는 최대한의 대중서를 만들어서 젊은 세대와 소통을 꾀해 본 겁니다.”
출간 500권에 연동시켰던 은퇴 시점은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한 상태. “필자들과 한 출간 약속을 다 지킬 때까지는 현역에서 물러나기 어렵겠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은퇴 뒤 푸른역사의 미래에 대해서도 아직 정해진 게 없다.
“이 시점에서는 마무리가 중요한데, 제가 출판 일을 하면서 사람을 키우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승계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거죠. 바깥의 친한 후배들한테 출판사 인수를 권유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시장 상황에서는 미안해서 그러지를 못하겠어요. 공개 모집을 비롯해 여러 방안을 구상 중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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