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동체의 큰 별이 지다

김수종 2026. 4. 1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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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시대를 개척한 서명숙, 박종규 “폭삭 속았수다. 잘 갑서예”

제주 공동체의 큰 별이 졌습니다. 오름 기슭에 유채꽃이 노랗게 물들고 바닷가에 갯무꽃이 보라색 색칠을 하는 사월은 올레길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입니다. 그러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하늘나라로 떠나간 올해 사월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제주도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올레길의 에너지를 받았던 수많은 사람의 상실감이 큽니다.

​이보다 며칠 앞서 우리나라 재계의 존경받는 어른 박종규 (주)KSS해운 창업자가 서귀포에서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박 회장은 투명 경영과 '사원이 주인이 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반세기를 치열하게 노력하며 '새로운 자본주의'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제주 청년들의 기개를 살려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두 사람은 하는 일은 달랐지만 제주라는 삶의 터전 위에서 길을 내고 바다를 일구며 우리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어주었던 분들입니다. 치열했던 삶을 한라산 기슭에서 마무리한 두 거목의 행적을 떠올리며, 개인적 인연의 실타래를 되감아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제주의 가치를 세계에 알린 '바람의 딸'
2007년 제주올레 개장을 앞두고 서명숙 이사장이 1코스 성산포 말미오름을 답사하고 있다.

고(故) 서명숙 이사장은 필자보다 열 살쯤 아래지만 선배 같은 언론계 후배였습니다. 그녀의 삶을 상기해 보자면, 10대는 제주의 '요망진' 여학생이었고, 20대는 운동권 대학생으로, 30·40대엔 언론계에서 독종 기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인생 후반부에는 제주 올레길을 열어 수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게 해준 나들이 문화의 개척자였습니다. 지난 3월 초까지도 카톡방에서 올레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제 다시 못 올 길을 떠났다니 서운하기 그지없습니다.

​2008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그녀의 권유로 네 번째 올레 코스(현재의 8코스)를 처음 걸었을 때 일입니다. 수백 명의 올레꾼이 중문 해수욕장을 지나 대평 박수기정으로 향하던 그날, 3월의 봄비는 무심하게도 쏟아졌습니다. 흠뻑 젖은 채 기진맥진해 종점에 꼴찌로 들어서자 그녀가 다가와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아이고 선배님, 속았수다. 좋속예?"

​아마 요즘 우리 제주 청년들도 이해하지 못할, 지친 상대를 깊이 어루만지는 제주어 인사였습니다. 작년 11월, 서 이사장과 함께하는 한림원(제주대 총장 자문기구) 카톡방에서 비양도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필자가 예전 칼럼에 기고했던 '비양도 여자 이야기'를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포항 소녀가 친구 따라 제주 구경을 왔다가 비양도 청년 뱃사공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한 러브스토리입니다.

​기사를 읽은 서 이사장의 답글은 절절한 인생 고백이었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13건의 소송과 격무에 시달리며 영혼의 바닥 긁는 소리를 듣던 그녀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비양도였습니다. 여고 동창생과 함께 갯무꽃 흐드러진 비양봉 정상 등대에 기대어 한라산을 바라보며 '멍때리기'를 하던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젠 나 서명숙을 위해 살련다. 꿈 많던 명숙이에게 생을 돌려주련다."

​그 결단이 오늘날 430km의 제주 올레길을 만드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찾아 비양도로 온 포항 아가씨처럼 그녀도 비양도의 힘에 이끌려 인생을 바꿨으니, 내년 봄엔 꼭 비양도에 가서 그 '포항댁'을 만나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명숙이는 이 봄 비양도가 아니라 하늘길로 가버렸네요.

​서 이사장이 정말 바꿔놓은 것은 제주 관광의 패턴입니다. 렌터카를 타고 명소와 맛집만 점 찍듯 다니던 '판에 박힌 관광'이 허물어졌습니다. 차가 없는 길을 두 발로 걸으며 마을의 속살을 보고 가게에서 사이다 한 병 사 마시는 '느림의 여행'이 정착된 것입니다. 여행을 '점(點)의 여행'에서 '선(線)의 여행'으로 바꿔놓은 혁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본의 개발 논리가 섬을 뒤덮으려 할 때, "있는 그대로의 제주가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낸 문화적 승리자였습니다. 박수기정 올레길에서 "개발제한이 풀릴 것을 기대하는 외지인 땅 주인들의 기대엔 절대 반대"라고 말하던 그녀의 마음엔 언제나 제주의 원형을 보전하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서명숙 이사장은 이 시대 제주가 낳은 진정한 '바람의 딸'이었습니다.

 '새로운 자본주의'를 실천한 재계의 큰 어른
2017년 HRA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박종규회장의 모습.

박종규 KSS해운 창업자는 도민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알고 보면 제주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바다의 철학자'였습니다. 서귀포에 정착한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를 통해 알게 된 박 회장은 위암 진단 후 한라산 기슭에서 요양하며 남다른 경영 철학을 들려주었습니다.

​선원 밀수를 뿌리 뽑고 비자금과 리베이트 관행을 차단하며, 자식 세습 대신 전문경영인 체제를 안착시킨 치열한 여정이었습니다. 종업원을 인생을 투자하는 주주로 대접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그의 결의가 선합니다. 그는 제주의 맑은 공기와 풍광이 병마를 다스리고 자신의 경영 철학을 최종적으로 가다듬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특히 제주의 대학생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HRA(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에 단골특강 강사로 초청됐을 때의 일화는 각별합니다. 박 회장은 강의가 끝나면 강의료를 받는게 아니라, 오히려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씩 아카데미에 기부하시곤 했습니다. "좋은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는 어른들보다 학생들에게 들려줘야 해"라며 청년들을 아끼던 속 깊은 배려였습니다. 서울대 학생 시절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경영 철학에 크게 감명받았다던 그의 고백과 맥락이 닿는 언행이었습니다.

​박 회장의 초청으로 참석했던 서울에서 열린 KSS 창립 50주년 기념식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의 지론인 '새로운 자본주의'를 역설하며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 구절을 인용해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경고했습니다. 자본가가 자본을 투자하듯 노동자는 소중한 인생을 투자하는 것이니, 마땅히 주주로 대접해야 한다는 철학이었습니다. 5공화국 시절 경제인의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가 '사회주의자'라는 비판까지 감수했던 그의 뚝심이 읽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날 기념식장에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노래 '마이 웨이(My Way)'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의 선곡인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I did it my way(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오)"라는 가사 구절이 흐를 때, 박 회장의 입술도 멜로디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습니다. 그 고백은 평생 자본의 도덕적 토대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한 기업가의 좌우명과 같았습니다.

​박 회장의 빈소는 단촐했고 자손들만 영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만한 명성이면 정·재계 인사들이 줄이어 찾아올 법한데, 그는 제주에서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박종규답게' 소박하고 단정했습니다.

​서명숙이 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했다면, 박종규는 바다를 일구며 자본의 도덕적 토대를 세웠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의 '마이 웨이'를 걸었지만, 결국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지점에서 만났습니다. 서 이사장이 낸 길 위에서, 또 박 회장이 지켜온 바다 앞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을 되새겨 봅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두 분의 명복을 빌며,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폭삭 속았수다. 잘 갑서예."

김수종
김수종.

제주 출신으로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주필까지 역임한 언론인이다. 뉴욕특파원과 LA한국일보 기자를 거치면서 유엔과 환경문제, 실리콘밸리, 미국에너지산업 등을 취재한 경험을 살려 각종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국제녹색섬포럼 이사장, 제주그린빅뱅추진 공동위원장, 제주대 한림원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주 청년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설립한 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HRA)에 19년째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0.6도(2003)', '지구 온난화의 부메랑'(2007·공저), '고마워라 인생아'(2009),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