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로 떠나는성지순례] 단장의 세월, 삶이 깃든 성소가 품다

박찬희 2026. 4.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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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구 김포성당과 김포 장릉
구 김포성당. 박찬희

◇거친 돌에 희망 담아 지은 김포성당
그 돌을 보고 싶었다.

이번에 갈 곳인 구 김포성당 관련 자료와 사진을 찾아봤다. 컴퓨터 화면에는 돌로 지은 간결한 서양식 성당이 나타났다. 1956년 신자들이 직접 돌을 나르고 쌓아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성당을 세웠을까.

성당을 찾아가는 날은 하늘이 방금 물로 씻어낸 듯 맑고 청량했다. 벚꽃과 개나리가 서로 뒤질세라 활짝 피었고 나뭇잎은 생기 머금은 연둣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날은 어디를 가든 나들이 떠나는 기분이다. 성당 앞에 도착하자 성당의 역사를 담은 거대한 부조상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앞으로 가서 찬찬히 살펴봤다.
구 김포성당의 건립 과정을 보여주는 부조상. 박찬희

성당 건립 당시 신자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농사일을 끝낸 저녁에서야 공사가 시작됐다. 남성 신도들은 산으로 가 돌을 캐오고 여성 신도들은 땅을 일구거나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왔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건설 장비를 지원했다. 그들이 이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손을 멈추지 않은 건 아마도 종교적인 믿음과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절실한 마음 때문이지 않았을까?

피나는 노력 끝에 1956년 12월 성당 건물이 완공됐다. 언덕 위에 지어져 김포의 랜드마크가 된 성당은 신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곳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당은 김포 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그후 신자가 계속 늘어나자 1990년에는 기존 성당 아래에 새 성당을 지었다. 돌로 지어진 옛 성당은 2013년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구 김포성당. 박찬희

성당으로 가려면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 옆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성당과 벚꽃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잠깐 풍경을 감상하고 올라가다 뒤로 돌아 김포를 둘러봤다. 지금은 아파트에 가려서 속 시원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눈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사방이 훤히 보였을 것이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성당이 한눈에 보였다. 서양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마주칠 법한 성당처럼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1950년대 당시라면 얼마나 웅장하고 대단하게 보였을까. 성당 벽을 이룬 돌에 살며시 손바닥을 대봤다. 거친 돌 하나하나에 희망으로 성당을 짓던 이들의 노고가 녹아 있었다.
 
구 김포성당 벽면의 돌. 박찬희
◇사람들의 삶으로 채워진 성당
구 김포성당의 가치는 단지 건축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느 절이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 성당을 다닌 사람들에게 이곳은 기억이자 추억이며 삶의 한 부분이었다. 아침에 밥을 먹듯 성당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성당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깊은 유대를 맺었을 것이다. 힘들 때는 든든하게 기댈 언덕이었고 기쁠 때는 함께 기쁨을 나눌 너른 마당이었다. 성당 건물에는 그 많은 사람들의 삶들로 가득 채워졌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성당이 살아 있는 듯 따뜻하게 다가왔다.
 
구 김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 박찬희
성당을 소개하는 자료에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기둥이 없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아름답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당 내부가 궁금해 안으로 들어갔는데, 뜻밖에 많은 신자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2015년 한국 최초로 성체(거룩한 몸이란 뜻으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함) 순례 성지로 지정돼 누구나 성체를 조배(예배)하며 영적인 휴식을 얻을 수 있도록 늘 개방됐다. 그래서 그런지 성당 안은 고요하고 엄숙했으며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온 빛으로 더욱 숭고해 보였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경건한 분위기에 이끌려 오전 11시에 진행된 미사에 참석했다(매일 오전 11시에 미사가 시작된다).
 
구 김포성당 십자가의 길. 박찬희
성당 옆 언덕에는 정성스럽게 가꾼 십자가의 길이 마련됐다. 길 좌우로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기개를 자랑하듯 하늘로 쭉쭉 솟아올랐다. 이 길은 일반인들이 걸어도 휴식하고 명상하기에 알맞아 보였다.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천천히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길 끝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머리와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장릉의 모습. 박찬희

◇원종과 인헌왕후 잠든 장릉으로
'해질 무렵에 성당에 온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뒤로 하고 김포 장릉으로 떠났다.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어머니인 인헌왕후가 잠든 곳이다. 대중에게 이곳은 왕릉 자체보다 몇 년 전 불거진 '왕릉뷰' 논란으로 널리 알려졌다. 장릉 인근에 짓던 아파트가 장릉의 경관에 영향을 미치자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서는 사전 심의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며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건설사는 공사 중지 명령 취소 소송을 제기해 최종 승소해 공사가 마무리됐다.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장릉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심에서 가까워 부담 없이 나들이하기에 좋은 것 같았다. 매표소를 지나 먼저 장릉역사문화관에 들렸다. 왕릉마다 마련된 역사문화관에는 해당 왕릉의 역사와 특징을 잘 소개하고 있어 왕릉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역사관은 장릉을 방문하는 이들이 궁금해 하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는 과정을 알기 쉽게 전시했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8세 때 정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왕위에 오른 광해군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았다. 결국 총명하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졌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가시기 전에 자신의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렸다는 이유로 집을 빼앗겼다. 연이은 불행에 충격을 받은 정원군은 1619년 세상을 떠났고 남양주에 묻혔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623년,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인조반정의 주인공 인조였다. 162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아버지의 무덤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인조는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효를 다하기 위해 아버지를 국왕으로 추존하려 노력했다. 결국 신하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아버지를 원종으로, 어머니를 인헌왕후로 추존했다. 무덤은 장릉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왕릉에 걸맞는 시설을 갖추게 됐다.
 
장릉으로 가는 숲길. 박찬희

◇아름답고 편안한 숲길을 걸으며
원종의 능으로 가는 숲길은 아름답고 편안한 산책로 같다.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지만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길 좌우로 목련을 비롯한 봄꽃이 활짝 피었고 여기저기서 연둣빛 어린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사람들 발걸음은 가벼웠고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예쁜 꽃을 볼 때면 꽃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남겼다.

길을 걷다 만난 재실은 나무에 둘러싸여 조선 양반들이 경치좋은 곳에 지은 집인 별서처럼 보였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를 관리하는 곳이다. 재실 입구에는 커다란 목련이 눈부시게 피어 기분 좋게 재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널찍한 재실은 예부터 지금까지 정성껏 관리한 듯 깨끗하고 깔끔했다.

재실을 나와 곁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연못 주위를 나무가 늘어선 산책길이 감쌌고 연못 안에는 매혹적인 섬이 단아하게 자리 잡았다. 연못 둘레에도, 섬에도 갖가지 꽃이 화사하게 피어 왕릉이라기보다 유서깊은 정원에 온듯 싶었다. 연못은 인공적인 느낌 대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가득해 즐거운 봄나들이 장소로 손색이 없었다.
김포 장릉 재실 곁의 연못 풍경. 박찬희

잠시 연못에 넋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원종의 무덤을 만나러 올라갔다. 홍살문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니 정자각이 나왔다. 정자각을 돌자 언덕 위에 놓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무덤이 한눈에 보였다. 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왼쪽이 원종의 무덤,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무덤이었다. 역모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식을 지켜봐야했던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훗날 또 다른 아들이 왕이 됐어도 찢어졌던 마음은 어찌할 수 없지 않았을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살펴보는 대신 명분에 치우쳐 병자호란을 막지 못했고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돌아온 세자를 독살했다는 의심마저 받았다. 그런데 인조의 무덤인 파주 장릉이 이곳 원종의 무덤인 장릉에 인사라도 하듯 남북으로 놓였다는 걸 떠올리면, 인조가 부모를 위하는 깊은 효심을 보는 듯 싶었다. 죽어서 지금까지 인조의 효도를 받는 원종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하다 장릉을 떠났다. 이때에도 장릉을 찾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닿는 휴식과 역사의 공간
오전에 둘러본 구 김포성당은 아름다우며 사람 냄새가 물씬 났다. 오후에 찾은 장릉은 권위적이라기보다 편안하고 소박하고 자연스러웠다. 성격은 다르지만 두 곳 모두 김포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김포에는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갈 수 있는, 매력적인 영감과 휴식과 역사의 공간이 있다.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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