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현대 무협소설의 ‘일대종사’(一代宗師) 김용(金庸)

강현철 2026. 4. 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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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客縵胡纓(조객만호영·조나라 협객은 거친 갓끈을 매고)

吳鉤霜雪明 (오구상설명·오구검의 칼날은 서릿발처럼 빛나네)

銀鞍照白馬 (은안조백마·은 안장이 흰 말에 번쩍이며)

颯沓如流星 (삽답여류성·날래기가 마치 유성과 같구나)

十步殺一人 (십보살일인·열 걸음에 한 명을 베어 넘기며)

千里不留行 (천리불류행·천 리 길을 가도 멈추지 않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의 ‘협객행’(俠客行)이란 시다. 한때 협객을 꿈꿨던 그는 당나라 시대 무(武)를 숭상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거나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협객들의 호탕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주해, 후영 등 전국시대 협객들이 신릉군을 도와 조나라를 구한 일화를 인용해 그들의 의로움을 예찬했다.

중국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무협 소설’이 존재한다. 무협(武俠)이란 ‘무술’과 ‘협의’를 소재로 하는 장르로, ‘동양의 판타지’, ‘오리엔탈 판타지’로 불린다. 불의하고 부도덕한 권력에 맞서 사회적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무협의 원류는 멀리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기는 ‘유협열전’(游俠列傳), ‘자객열전’(刺客列傳)을 통해 ‘협’(俠)을 얘기한다.

‘유협열전’(游俠列傳)은 한나라 때 저명한 협객(俠客)인 주가(朱家), 극맹(劇孟), 곽해(郭解) 등에 관한 전기다. 사마천은 유협(遊俠)은 믿음이 있고, 결정에 과감하며, 약속에 성실하고, 남을 위해 생사를 돌보지 않으며, 능력이나 공덕을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협객을 향곡지협(鄕谷之俠), 포의지협(布衣之俠), 여항지협(閭巷之俠)으로 분류해 논했다.

‘자객열전’(刺客列傳)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말(曹沫), 전제(專諸), 예양(豫讓), 섭정(聶政), 형가(荊軻) 등 다섯 명의 자객 이야기를 다룬다. 유협열전이 ‘남을 돕는 의리’에 초점을 맞췄다면, 자객열전은 ‘자신을 알아준 은혜에 보답하는 결기’를 핵심으로 한다.

한자 협(俠)을 뜯어보면 사람(人)이 양옆에 두 사람(入+入)을 끼고 있는 형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부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협열전’에서 강조하는 협의 구체적인 조건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信) ▲ 행동은 끝까지 완수해 결과를 내는 과(果) ▲남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기(捨己) ▲큰 은혜를 베풀고도 절대 생색내거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불긍(不矜)을 꼽는다. 즉 법이나 권력보다 ‘개인 간의 의리와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는 정신이 바로 협의 본질이다.

정치적 회오리에 휘말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해야 했던 사마천의 상황이 협을 숭상하는 역사를 만들어냈으며, 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사의 민중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격적인 무협 소설이 등장한 것은 당나라때다. ‘규염객전’(虯髯客傳), ‘홍선전’(紅線傳), ‘섭은랑’(聶隱娘), ‘곤류노’(崑崙奴)』등이 여기에 속한다.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水滸傳)도 무협지로 꼽힌다.

무협소설의 대가 고(故) 김용. [연합뉴스 자료사진]


근현대 신파 무협 소설의 대가로는 김용(金庸)과 양우생(梁羽生), 고룡(古龍) 등 세사람이 거론된다. 이가운데 단연 으뜸은 김용이다. 서양에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이 있다면 동양엔 김용(金庸·진융·1924~2018)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 중국 무협 소설의 ‘일대종사’(一代宗師)로 불리는 이가 바로 고(故) 김용(필명)이다. 본명은 차량융(査良鏞), 홍콩식 이름은 루이스 차다. 그는 현대 무협 소설을 단순한 오락 수준에서 순수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거장으로 평가된다. 1924년 저장성에서 태어나 기자와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5년부터 1972년까지 총 15편의 대작을 남겼다.

어리숙하지만 성실한 곽정과 영리한 황용의 모험과 성장을 다룬,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사조삼부곡’(射雕三部曲), 사제지간인 양과와 소용녀의 애절한 사랑과 무림의 풍파를 그린 ‘신조협려’(神鵰俠侶), 원나라 말기 전설의 무기 의천검과 도룡도를 둘러싼 문파 간의 갈등을 다룬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를 비롯, ‘천룡팔부’(天龍八部), ‘소오강호’(笑傲江湖), ‘녹정기’(鹿鼎記) , ‘벽혈검’(碧血劍), ‘설산비호’(雪山飛狐)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중국 대륙에서 1억권 이상, 대만에서 1000만권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의 히트 영화 ‘동방불패’는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에선 1980년대 ‘영웅문’이란 이름의 시리즈로 처음 선보여 수많은 이들이 밤잠을 설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필력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 하여 ‘신필’(神筆)로 불린 김용의 작품은 ▲송, 원, 명, 청 등 실제 중국 역사와 허구의 무협 세계를 정교하게 엮은 역사와 허구의 결합 ▲불교, 도교, 유교 등 3교(三敎)는 물론 시와 문장, 바둑, 의술 등 방대한 지식을 녹여낸 인문학적 식견 ▲ 선악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입체적인 캐릭터 등이 특징이다.

무협지의 등장인물은 크게 대협과 악인으로 갈리지만 김용의 소설에서는 현실 세계의 인간처럼 구분이 모호한 인물이 많다. 그래서 기존의 조잡한 무협 소설과 차별화되는 서사 구조와 문체로 ‘신무협’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홍칠공이 곽정에게 가르친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의 ‘잠룡물용’(潛龍勿用·물 밑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 ‘항룡유회’(亢龍有悔·높이 나는 용은 후회가 있다)는 ‘역경’(易經)에 나온 문구다. 북명신공(北冥神功)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따왔고, 능파미보(凌波微步·물결 위를 사뿐히 걷는 가벼운 발걸음)는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에서 인용했다.

김용, ‘의천도룡기’


김용이 창조해낸 무공은 과거 무협지 외에 경전이나 시부(詩賦) 등에서 의미를 빌려온 것들이 많다. 두꺼비를 본뜬 합마공, 미꾸라지를 연상케 하는 니추공, 상대의 힘을 빨아들이거나 이용해 공격을 되돌리는 흡성대법과 건곤대나이, 장력과 지력으로 기를 발출해 적을 죽이는 화염도와 육맥신검 등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은 홍콩, 대만, 중국 등 중화권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수억 부 이상 판매됐으며,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있다. 중국 근대 소설의 정수인 ‘홍루몽’(紅樓夢)을 연구하는 학문을 ‘홍학’(紅學)이라 부르듯 김용의 소설을 연구하는 ‘김학’(金學) 또는 ‘용학’(庸學)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김용은 1924년 저장(浙江·절강)성 해령의 명문가인 해령사가(海寧査家)에서 태어났다. 저장성립연합고중 중학부, 저장성 취저우중학(衢州中學), 중국국민당이 당(黨)·정(政)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중국국민당중앙정치학교(中國國民黨中央政治學校·현 대만 국립정치대학의 전신) 외교학과를 다녔다.

30대 초반 나이에 신문사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무협 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집필을 시작했다. 자신이 일하던 신문의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직접 소설을 쓰고 연재한 것이 거장 김용을 탄생시킨 첫발이었다. ‘서검은구록’은 청 건륭제가 실은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며, 건륭제에게는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피가 흐른다’는 야사를 모티프로 했다. 홍콩 명보(明報)는 그가 1959년 창간한 신문이다. 김용은 1993년 은퇴할 때까지 주필로 일했다. 명보가 급신장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김용의 무협소설을 독점 연재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과 제자백가, 불교와 도교의 경전을 섭렵했으며, ‘강호기협전’과 ‘근대협의영웅전’을 읽으며 무협지의 기본 초식을 익혔다.

1955년의 ‘서검은구록’ 이후 17년간 15편의 무협소설을 발표한 김용은 신필이란 찬사를 받으며 천하를 제패한다. 그의 소설은 ‘칼과 검의 그림자가 번득이는 소용돌이에서도 인간성의 가장 순결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 능하고, ‘웃고 떠들고 화내고 욕하는 것이 모두 문장이 된다’는 찬사를 들었다.

15편의 소설 중 ‘월녀검’을 제외한 14편의 소설 제목 첫자를 모으면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비설연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원)이란 시구가 만들어진다.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 사슴을 쏘아가고, 글을 조롱하는 신비한 협객이 푸른 원앙새에 기댄다’는 뜻이다.

1972년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한 진융은 이후 40여년간 ‘살아있는 전설’로 남았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저장대학교 인문학원장을 역임했다. 노년에 향학열을 불태워 2005년 81세의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0년 86세 때 역시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의 레지옹 드뇌르 훈장과 영국의 대영제국 훈장도 받았다.2018년 10월 30일 향년 94세로 생을 마감하며 전 세계 무협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김용의 장례식에는 알리바바 회장 마윈, 배우 유덕화, 초대 홍콩 행정장관 퉁치화, 전 홍콩 의원관리국 주석 에드워드 렁, 배우 황샤오밍, 영화감독 허안화, 영화감독 두기봉, 영화 제작자 장지중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찾았다. 김용과 같은 저장성 출신인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열혈 애독자로, 그의 집무실에는 김용의 작품들이 꽃혀 있다. 마윈은 조화에 ‘일인강호, 강호일인’(一人江湖 江湖一人·한사람의 강호, 강호의 한사람)라는 글귀를 적었으며, 유덕화는 조화에 ‘덕성이 높고 명망이 크다’德高望重)며 고인의 위대함을 기렸다. 홍콩 현지 매체들은 김용의 장례식장에 조화가 넘쳐나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면서 매우 보기 드문 장면이라고 보도했다.

유족은 “풍모는 바로 대협객의 정을 품었고, 욕심 없이 정계를 단호히 논평하였으며, 오온이 모두 공임을 깨달아, 웃으며 학수레를 타고 하늘로 오르네”(有容乃大俠客情,無慾則剛論政壇,看破放下五蘊空,含笑駕鶴倚天飛)라는 고인이 생전 남긴 시를 발표했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주인공은 낮에는 신문기자로 일하고 퇴근 후에 무협 소설을 쓰는 남자다. 김용을 떠올리게 한다. ‘화양연화’의 감독 왕가위는 ‘동사서독’과 ‘일대종사’ 같은 독특한 무협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동사서독’은 ‘사조영웅전’을, ‘일대종사’는 ‘신조협려’를 각색한 영화다.

강현철 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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