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인사이트] 서울역에 울려 퍼진 박정희 장손의 해병가 — 박지만 가족이 지나온 시간과 현재

김태현 기자 2026. 4. 17.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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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우렁찬 복창과 함께 깊숙이 허리를 굽힌 청년. 수많은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를 지켜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를 이은 장손이 해병대 첫 휴가를 맞아 부모 앞에 섰다. 육군 대장 할아버지도, 육사 출신 아버지도 걷지 않은 길이었다.

[우먼센스] 올봄 서울역 대합실에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펼쳐졌다. 짙은 해병대 군복을 차려입은 20대 청년이 오가는 시민들 한가운데 우뚝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이내 그의 입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허리를 90도로 꺾어 올리며 마주선 중년 부부에게 큰절을 올렸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졌다. 이 청년은 박지만 EG 회장과 서향희 변호사의 장남, 스물한 살 박세현 씨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손이기도 하다.

사진=유튜브 캡처

한때 긴 터널을 헤맸던 아버지가, 그 아들이 해병대 군복을 입고 우렁차게 서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 무너졌던 사람이 가정을 일으키고, 그 가정이 이런 아들을 길러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단순한 군 입대 소식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다.

"해병대 가겠습니다" 아들의 뚝심

2025년 가을, 박세현 씨가 해병대 자원입대 의사를 밝혔을 때 가족 내부의 반응은 엇갈렸다. 아버지 박지만 회장은 아들의 결심을 조용히 존중한 반면, 어머니 서향희 씨는 굳이 힘든 해병대를 자원하는 것을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아들의 완강한 의지를 꺾지 못한 채 부모 모두 뜻을 받아들였고, 세현 씨는 지난해 10월 27일 해병대 병사 1323기로 입대했다.

사진=국방홍보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인물이다. 세현 씨의 부친 박지만 회장 또한 육군사관학교 37기 출신으로 대위로 전역한 육군 가문이다. 2대에 걸친 육군의 계보를 자발적으로 벗어나 해병대 수색대까지 지망한 것은 세현 씨 개인의 강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게 주변의 공통된 반응이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세현 씨가 귀국해 입대를 선택한 배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다. 다만 군 관계자들에 따르면 입대 전부터 해병대 수색계열을 희망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수색대는 상륙 작전의 선봉에 서는 특수전 부대로, 해병대 안에서도 선발 과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훈련병 동기들이 직접 뽑은 '겅호상'

경북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약 6주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세현 씨는 지난해 12월 4일 수료식에서 눈길을 끄는 수상자로 호명됐다. 주한 미 해병대사령관이 수여하는 '겅호상(Gung Ho Award)'이었다. 겅호는 '함께, 강하게'를 뜻하는 미 해병대의 정신을 담은 구호다. 이 상은 단순히 훈련 성적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혹독한 훈련을 함께 버텨낸 동기들의 투표로 최종 수상자가 가려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각별하다.

매일신문에 따르면 해병대 교육훈련단 관계자는 "유학 생활로 동기들보다 나이가 위였고 정치인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초기엔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하는 시선도 있었다"면서 "막상 훈련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린 동기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결과가 겅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수료식 현장에는 박지만 회장 부부가 나란히 참석해 아들의 수료를 지켜봤다. 세현 씨가 아버지 앞에서 관등성명을 대며 거수경례를 올릴 때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박 회장은 경례를 받고 나서 아들의 어깨를 힘껏 두드린 뒤 포옹했다. 어머니 서향희 씨와 재회하는 장면에서도 세현 씨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먹였다. 2년 넘게 공개 행보가 없었던 박지만 회장 부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지만, 세 사람이 어우러진 가족의 장면이 더 큰 울림을 남겼다.

'최전방, 박격포 특기' 강화도 경계선에 서다

수료 후 세현 씨는 해병대 2사단 보병부대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주특기는 박격포다. 현재 강화도 일대 전방 경계작전 부대에서 다른 대원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 중이다. 매일신문에 따르면 해병대 2사단 관계자는 "박 씨는 동료들과 두루 원만하게 지내며 맡은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면서 "대원들도 그의 출신 배경에 특별히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사진=박근혜 미니홈피

배치된 부대에서 특별 대우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배경을 내세우는 행동 없이 묵묵히 복무하는 모습은 수료식에서 받은 겅호상이 단순한 반짝 인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군 복무를 마치는 시점은 내년 4월로 예정돼 있다.

4월 초, 세현 씨는 자대 배치 후 첫 정기 휴가를 받아 서울역에서 부모와 재회했다. 군복 차림으로 역사 안에 선 청년과, 그 앞에 선 중년 부부. 세현 씨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군가와 구호를 복창한 뒤 깊은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 서향희 변호사는 아들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으며 눈가를 닦았고, 박지만 회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다 따뜻하게 안아줬다.

이는 해병대에서 오랜 세월 선후임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온 문화다. 기초훈련을 마치고 처음 가족을 만나는 날, 공개된 장소에서 큰절과 군가 복창으로 부모의 양육에 감사를 표하고 강인한 군인으로 태어났음을 알리는 의식적 행위다. 공식 규정이 아닌 문화로 전해지는 만큼 강제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정성이 담긴 장면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요즘 저런 모습 보기 힘든데", "보는 저까지 나오게 만드네요"라는 반응이 영상 댓글창을 가득 채웠다. 이 장면이 더 깊이 와닿는 데는 아버지 박지만 회장의 지난 시간을 알고 나면 더욱 그렇다.

박지만과 서향희 그리고 네 아들

박지만 회장의 젊은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1989년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됐고, 이후에도 수차례 같은 문제로 고초를 겪었다. 한 시대 가장 강력한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무게는 그에게 영광보다 부담으로 작용한 시간이 길었다. 그런 박 회장이 안정된 삶을 되찾은 계기는 서향희 변호사와의 만남이었다는 점을 주변 인사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결혼식 당시 "오래 기다린 끝에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며 감격을 숨기지 않았다.

사진=박근혜 미니홈피

2004년 12월 결혼식 날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는 당초 예상을 훌쩍 넘는 2000여 명이 몰렸다. 비공개로 치르려 했지만 결혼식 장소가 알려지자 하객들이 물밀 듯 이어졌다. 전북 익산 출신의 서향희 변호사는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31기로 수료한 인물이다. 결혼 전 강남 논현동 새빛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결혼 후엔 법무법인 대표를 맡는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갔다. 서 변호사는 2012년 9월 법조계 일선에서 물러나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현재도 휴업 상태다.

그 공백을 채운 건 육아였다. 2005년 세현 씨를 낳은 뒤 2014년 차남 박정현 씨, 2015년에는 쌍둥이 아들 박지현·박수현 씨를 연달아 출산하며 아들만 넷인 가정을 이뤘다. 2016년에는 국민대학교 글로벌 창업벤처대학원 객원교수로 임용돼 잠시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현재는 다시 육아에 집중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1999년부터 거주해온 강남구 청담동 빌라 펜트하우스에서 가족과 조용히 지내는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 인근 주민들의 전언이다. 한 이웃 주민은 "가끔 박 회장 가족과 마주친다. 서 씨가 아이들과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특별한 집안이지만 우리 눈에는 정말 평범한 가족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카 바보' 박근혜, 이번엔 자리를 비웠지만

어쩌면 세현 씨의 큰 절을 유독 아쉽게 바라봤을 사람이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세현 씨가 태어난 2005년 9월 12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 전 대통령은 최고위원회의 도중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 가문에 귀한 아이가 생겼다"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쓸 만큼 세현 씨 탄생을 기뻐했고, 이후 바쁜 정치 일정 속에서도 틈틈이 조카를 찾으며 각별한 애정을 이어갔다. 자서전에도 세현 씨의 출생 순간을 생생히 기록했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는 조카를 '보물 1호'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박근혜 미니홈피

지난해 12월 수료식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이 참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이 머무는 대구 달성에서 포항까지는 차로 한 시간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 주변과 가까운 친박계 소식통 A 씨는 "박 전 대통령이 세현 씨를 각별히 아끼는 건 사실이지만 요즘은 외부 일정을 거의 소화하지 않는다고 들었다"면서 "박 회장 부부는 물론 세현 씨와도 관계가 좋은 것으로 안다. 세현 씨가 고모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 첫 휴가 때 찾아뵙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박 전 대통령 남매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만은 아니다. 박지만 회장은 2014년 초 서향희 씨와 함께 청와대를 찾은 이후 한동안 누나 박근혜 전 대통령과 교류가 단절됐다. 비선 실세 논란이 불거진 시절, 박 회장이 측근 라인과 갈등을 빚은 것이 균열의 발단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앞두고 삼성동 자택에 머물던 시점에 박지만 회장 부부가 직접 찾아오면서 두 남매는 재회했다. 

소식통 A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걸 그때 다시 느꼈다고 하더라. 많은 말을 나눈 건 아니었는데 박 전 대통령이 먼저 동생 손을 잡았고, 박 회장 눈가가 촉촉해졌다고. 옆에 있던 서 씨도 눈물을 보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박 회장은 누나의 재판과 수감 기간, 대구 이사까지 여러 방면으로 뒷받침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박정훈(이오이미지)

재계 일각에서는 세현 씨의 복무를 향후 EG 경영 참여와 연결 짓는 시선도 있다. EG에서 오랫동안 박 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해온 측근 관계자는 "박 회장이 EG 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2019년부터"라며 "그 이후 실적 개선에 많은 공을 들였고 에너지 분야 등 사업다각화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사업가 박지만으로 이름을 알릴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고 전했다. 

산화철 판매와 에너지 분야를 주축으로 하는 EG는 2024년 65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영업 적자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 박 회장이 최대주주로서 실적 개선에 공을 들이는 가운데, 장남이 최전방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 이미지가 훗날 경영 참여의 든든한 발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세현 씨 본인이 그런 계산으로 해병대의 길을 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친의 만류를 직접 설득해낸 결심, 훈련 중 동기들에게 압도적 신뢰를 받아 받아낸 겅호상, 강화도 최전방에서 박격포병으로 보내는 청춘. 이 모든 장면들은 계산보다 의지에 가깝다.

서울역 대합실에 울려 퍼진 해병가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나던 사람들 귀에 남았다.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스스로 택한 군복을 입은 한 청년이 부모에게 고개를 숙였다. 박정희의 장손이 아닌, 해병 박세현으로 서 있는 청년의 봄날이었다. 현재 세현 씨는 해병대 2사단에서 복무 중이며, 전역 예정 시기는 2027년 4월이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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