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쓴 소설 맞습니까?”… 노벨문학상 ‘백년의 고독’ 작가 마르케스

이한수 기자 2026. 4. 1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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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14년 4월 17일 87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02년.

1982년 노벨 문학상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에게 돌아갔다. 조선일보는 관련 소식을 1면에 이어 6면과 7면에 걸쳐 전했다. 6면에는 대표작 ‘백년의 고독’ 줄거리, 7면에는 마르케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실었다.

남미 작가의 노벨상 수상 뉴스를 3개 지면에 걸쳐 전한 까닭은 마르케스가 제3세계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첫 노벨상을 받은 마르케스처럼 한국 문학도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 것이다.

김윤식 서울대 교수는 기고를 통해 “이번 마르케스의 수상을 계기로, 우리 문학이 한 발짝 이 상(賞)에 가까이 간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보이기도”(1982년 10월 30일 자 7면) 한다고 적었다.

1982년 10월 22일자 7면.
1982년 10월 30일자 7면.

1967년 출간한 소설 ‘백년의 고독’은 수상 당시 이미 세계에 1000만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최근까지 5000만부 이상 팔렸다. 중남미 역사와 신화, 미신과 민담을 조합해 초현실과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적 이야기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평을 얻었다. 우리 문학계에도 잘 알려진 작가였지만 노벨상 수상 전에는 독서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수상자 마르케스는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 그의 작품집 역시 몇 해 전 여러 군데서 번역, 출간된 바 있는데 그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이번 수상으로 뒤늦게 재판(再版) 소동을 빚고 있다. 출판사들은 이처럼 마르케스의 지형(紙型)을 사실상 폐품 취급을 해왔으나 뜻밖에 다시 활용케 돼, 수상 발표가 나오자마자 이틀만에 책을 내놓는 등 출간에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982년 10월 30일 자 7면)

1997년 7월 31일자 29면.

마르케스의 주요 작품은 대부분 국내 번역됐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는다’ ‘족장의 가을’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등이다.

2007년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가 국내 출간됐다. 3부작으로 구상한 자서전 중 첫 권으로 유년 시절, 학창 시절, 신문기자 시절을 담았다.

“이 자서전에 서술된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험이거나 그가 살아온 콜롬비아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그를 작가로 만든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을 강조하듯이 이 책은 1950년 2월의 일화로 시작한다. 아라카타카의 집을 팔기 위해 그를 찾아온 어머니는 “하찮은 글이나 쓰면서 형편없는 보수를 받기보다는” 중단했던 법학 공부를 계속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은 채 부모에게 허락해 달라고 조른다. 만일 부모의 의사를 따랐다면, 오늘날 노벨문학상을 받고 세계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대신 아마도 상상력 풍부한 ‘실패한 법조인’이 되었을 것이다.”(2007년 3월 24일 자 D1면)

2005년 3월 11일자 A10면.

‘백년의 고독’은 여러 문인이 극찬하며 손에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산문학상을 받은 시인 서효인은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신에게 물었다. “이 작품이 과연 우리와 같은 종(種)이 쓴 게 맞습니까?”(2017년 11월 17일 자 C15면)라고 했다.

마르케스는 정치적 이유로 콜롬비아를 떠나 유럽과 멕시코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진보적 좌파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2011년 5월 21일자 A17면.

“가보(Gabo)란 애칭으로 불리던 마르케스가 결정적으로 카스트로의 품에 안긴 것은 1971년 벌어진 ‘파디야 사건’ 이후. 쿠바의 시인 파디야가 필화를 겪으며 ‘반역 시인’으로 체포돼 굴욕적인 자아비판까지 한 사건에 세계의 지식인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탄원서를 발표하며 항의했지만 마르케스는 서명하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 카스트로는 마르케스에게 수도 아바나에서 가장 좋은 동네에 집을 마련해줬고, 마르케스는 수시로 쿠바를 드나들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 “카스트로는 독재자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거가 유일한 민주주의 형태는 아니지요.” 왜 카스트로의 명예 보좌관으로 활동하느냐는 질문엔 “그는 내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합니다.””(2011년 5월 21일 자 A17면)

2007년 3월 24일자 D1면.

201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는 “마르케스는 피델 카스트로의 궁정(宮廷) 작가”라고 조롱했다.

별세 10주기인 2024년 유작 ‘8월에 만나요’가 출간됐다. 마르케스는 치매를 앓던 말년에 책으로 내지 말라고 했지만 두 아들이 출간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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