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스틸러] 도시락은 사랑을 싣고…손맛으로 꽉 채운 ‘한끼의 행복’

장다해 기자 2026. 4. 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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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침스틸러] (23) 영화 ‘청설’ 속 수제도시락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밥집 아들 용준
김밥·어묵·과일…정성으로 음식 준비
말 없이도 전해지는 풋풋한 감정 ‘오롯’
‘할머니 손맛 수라간’ 수제 도시락 판매
70~80대 어르신 900개 주문도 ‘척척’
제철 식재료 활용…집밥 먹은듯 ‘든든’
영화 ‘청설’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혹시 나 밥같이 생겼어? 넌 나만 보면 맨날 밥 먹었냐? 밥 먹어라! 밥 먹자! 그러니까.”

“미안. 밥집 아들이라 그래.”

영화 ‘청설’(2024년, 조선호 감독)의 주인공 용준(홍경 분)은 따끈따끈 정성을 담은 ‘미정 도시락’ 가게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수영장에 도시락을 배달하러 갔다가 수어로 대화하고 있던 여름(노윤서 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과거 수어를 배운 적이 있던 용준은 여름과 더 자주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읽으며 손짓 하나하나에 마음을 기울인다. 두 사람의 풋풋한 감정은 ‘수어’라는 사랑의 언어로 오가고 관객은 이들의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인 손끝의 대화에 빠져든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고 했던가.

여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 준비한 용준의 도시락.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뭐가 이렇게 많아?” “네가 뭘 좋아하는지 난 모르니까, 그냥 이것저것….” “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용준은 편의점 샌드위치로 끼니를 대신하던 여름을 생각해 평소 하지 않던 요리까지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다 준비한 그는 어머니 가게 한쪽에서 김밥을 큼직하게 말고 유부초밥을 빚는다. 어묵은 돌돌 말아 꼬치에 꽂고 과일은 색을 맞춰 가지런히 담는다. 전식부터 본식과 후식까지 빈틈없이 채운 도시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여름은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운다.

여름을 생각해 평소 하지 않던 요리까지 하며 도시락을 준비하는 용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도시락 속 음식 면면을 들여다보면 만든 이의 고민과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받는 이를 떠올리며 정성껏 준비한 만큼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이다. 영화 속 대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수어도 다르지 않다. 듣지 못해도 보고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때는 소리가 감정을 나누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밖에서 끼니를 거르지 않길 바라는 애정. 누군가의 하루를 생각하는 다정한 배려. 책은 빠뜨리고 가도 도시락은 절대 잊지 않고 챙겨갔던 시절, 난로 위에 밥을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을 쌓아두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나눠 먹었던 추억까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할머니 손맛 수라간’은 노인 일자리사업으로 추진돼 어르신들이 정성 들여 도시락을 만든다. 청주=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여기!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기성품이 아닌 엄마의 손맛이 곳곳에 배어나는 도시락이 있다. 올해로 7년이 된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할머니 손맛 수라간’은 어르신 30여명이 모여 도시락을 만들고 배달도 한다. 청주우암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매일 아침 6시30분 조리부터 시작해 보온 도시락에 담아 배달·수거하고, 용기를 씻기까지 모든 과정을 70∼80대가 맡는다.

“여기서 일하는 어머님들이 ‘우리가 장사한다고 덜줄 수는 없다’며 푸짐하게 담으세요. 반찬을 놓다보면 빈 공간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도 ‘모자람 없이 채우자’고 하죠.”

수라간의 도시락은 따뜻한 밥과 국, 건강을 생각한 반찬이 담겨 집밥의 맛을 낸다. 청주=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이곳을 총괄하는 시니어클럽의 유은희 팀장은 집밥에 가까운 맛이 재료에서 시작한다고 짚었다. 청주에서 난 쌀을 쓰고 인근 농수산시장에서 들여온 식재료로 반찬을 장만한다. 제철 나물을 중심으로 식단을 꾸리고 절기에 따라 상차림도 달라진다.

어머니가 반찬 투정을 하는 자식 입맛에 맞추듯 도시락 구성에도 신경 쓴다. 이곳은 주로 병원·약국·사무실의 점심밥을 대야 하기에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게 식단을 짠다. 고추장 제육볶음을 간장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에도 응한다. 된장국이 나간 다음날에는 다른 맑은국이나 매운 국으로 교체해 변화를 준다.

그 덕에 연매출은 평균 5억원에 이른다. 지난 방학 때는 급식을 대신해 초등학교에 납품하면서 매일 800∼900개에 이르는 도시락을 생산하기도 했단다. 사업 초기부터 함께한 김은선 할머니(82)는 “주문이 많이 들어오면 힘들어도 일할 맛이 난다”며 “집에 있으면 지루한데 일주일에 두번 정도 여기 나와 일하니 하루가 금방 간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6시30분 이곳에선 수백개 도시락 한칸 한칸을 가지런히 채운다. 청주=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이들이 모인 작업장은 늘 분주하지만 흐트러짐이 없다. 손발도 척척 맞는다. 어느 한명 지시하는 사람 없이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에 마치 인간 컨베이어벨트 같다. 수백개의 도시락통에 반찬을 깔고 뜨거운 밥을 퍼 담고 국을 따른다.

이날 도시락에는 현미밥과 콩나물국·치킨가스·깍두기·김자반·진미채·시금치·마늘장아찌·달걀말이·연근조림이 담겼다. 단돈 7500원인데도 9첩 반상이 호화롭다. 따뜻한 현미밥은 고슬고슬하고 찰기가 돌아 밥을 더 달라는 요청을 듣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청주우암시니어클럽은 반찬전문점 세곳을 운영한다. 이곳도 반찬가게에서 출발해서인지 특히 반찬 맛이 으뜸이다. 간이 세지 않아 재료 본연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함이 도시락의 중심을 잡아준다. 다채로운 식감에 씹을 때마다 맛있는 소리가 운율감을 더한다. 할머니가 손수 차려준 집밥을 먹은 듯 푸근함이 번진다.

사랑이라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도시락 한칸에 눌러 담은 온기처럼 타인을 향한 작은 몸짓이 큰 울림을 전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이타적인 마음은 제아무리 빠르고 정교한 인공지능(AI)이라도 감히 흉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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