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슈베르트와 광기의 스크랴빈… 임윤찬이 뜨겁게 달군 산토리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850 '가슈타이너'
스크랴빈의 소나타 2, 3, 4번
산토리홀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임윤찬 팬덤'

1822년 25살 슈베르트는 매독에 걸렸다. 당시에는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불치병이었다. 병으로 허덕이던 젊은 슈베르트는 이듬해 5월 한 편의 시 ‘나의 기도’에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나의 생명, 나의 육신, 나의 피
그 모두를 ‘레테’ 강물에 던져 넣어
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력한 의지로
나를 옮겨 놓아 주소서, 위대한 분이시여.”
저승으로 가기 전, 레테 강물을 마셔 이승의 고난을 잊게 해달라고 신에게 매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절규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1828년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의 직접 사인은 장티푸스였으나 매독으로 인한 육체의 소진이야말로 결정적이었다.
천국만큼 길고 아름다웠던 슈베르트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일본 투어 리사이틀이 열린 4월 9일 저녁 도쿄 산토리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850 ‘가슈타이너’ 2악장 주제 선율은 마치 레테 강이 흐르는 듯 적적함이 밀려왔다. 슈만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천상의 길이(Heavenly length)’라고 했던가. 2악장은 교회음악에 자주 쓰이는 A장조다. 웅장하고 당당한 1악장 D장조와 달리 임윤찬의 피아니즘은 그래서 경건함마저 묻어나왔다. 넉넉한 템포로 한 땀 한 땀 음표를 새겨갔다. 하지만 42마디부터 중간부에 들어서자 16분음표 음형에 얹히는 D장조의 ‘싱코페이션(당김음)’은 위로 솟구쳤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 객석을 들었다 놓았다. 그 절정은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진한 여운으로 충만했다. 슈베르트 음악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조바꿈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며 변화무쌍했다. 12분이 넘는 2악장 연주 시간은 천국만큼 길었지만 천국만큼 아름다웠다.
1악장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제시부 1주제부터 거침없이 달렸다. 알프스 요들송 풍의 2주제의 리드미컬함은 굴곡졌고, 특히 ‘Un poco piu lento(조금 더 느리게)’에서 포르티시모로 내려꽂히는 7마디 리듬은 양손을 번갈아 들었다 내리치며 특별히 더 강조했다. 제시부 반복, 그리고 재현부에서 한 번 더, 음반으로 들었던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3회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는 유니크했다.
소나타 형식에서 베토벤이 도입한 ‘스케르초’는 후배 슈베르트에게는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3악장의 약동하는 스케르초 주제는 그 어렵다는 강력한 2분의 3박자의 ‘헤미올라’ 리듬과 함께 통통 튀어 올랐다. 피아노에 능통했던 베토벤과 달리 노래하듯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던 슈베르트의 작품은 연주자에게 언제나 난곡으로 꼽힌다. 기술적인 면에서 임윤찬은 이미 슈베르트를 꿰뚫고 있었다. ‘트리오(중간 삽입부)’는 G장조의 밝디밝은 조성으로 청아하게 노래했다. 단순한 화음 진행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때론 바흐가 스쳐 지나갔다.
임윤찬이 이번 투어를 앞두고 SNS를 통해 밝힌 대로, 어릴 때부터 시계 소리 같았다는 4악장 도입부는 정연했다. 소나타 전체에 감초처럼 나타나는 셋잇단음표는 여기서도 임윤찬의 손끝에서 빛을 발했다. 잘게 쪼개지는 두 번째 론도(반복되는 주제 사이에 삽입구가 나타나는 형식) 주제는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그러나 육체의 병마로 아파하는 젊은이의 절규는 단조로 조바꿈할 때마다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끝은 최후의 3마디에 그대로 들리는 차분한 시계 소리였다.
4년의 담금질, 이토록 완성도 높은 스크랴빈

슈베르트가 고전과 낭만의 문턱에 있었다면 스크랴빈은 후기 낭만과 현대를 연결해주는 위치에 서 있다. 임윤찬의 후반부 프로그램은 스크랴빈의 소나타 2, 3, 4번이었다. 약관의 피아니스트가 스크랴빈을 낙점한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다.
모차르트 교향곡 최고의 해석가로 군림했던 거장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생전에 후기 교향곡 39, 40, 41번을 쉼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연주하곤 했다. 임윤찬과 아르농쿠르가 통했던 걸까. 그나마 쇼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3개의 소나타를 각각 한 개의 악장으로 옷을 갈아입히고 40여분 동안 체력의 한계까지 도달하며 한 호흡으로 달렸다.
고대 중국에서 가장 긴 장편 문학이론서는 육조시대 문인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이다. 문심조룡 제40장 ‘은수(隱秀)’ 편은 글쓰기의 백미와도 같다. ‘수’는 글자 그대로 화려하며 작품 안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새의 무리 중에서 학이 서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은’은 신비한 소리가 옆에서 전해오는 것 같고 숨겨진 문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이면에 함축된 표면적 의미 이상의 것이 담겨야 한다.
놀랍게도 임윤찬의 스크랴빈은 ‘은’과 ‘수’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끝내 ‘수’로 타올랐다. 스크랴빈의 사위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아노 학파의 적통이었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의 음반을 어릴 때부터 즐겨 들었다는 임윤찬. 그의 소나타 2번 첫 타건(打鍵)은 ‘은’의 신비한 소리가 전해오는 듯 조탁된 음색이자 몽환적인 스크랴빈 음악을 함께 표현하고 있었다. 이날 보여준 임윤찬의 광기(狂氣)는 내내 작곡가의 널뛰는 그것과 합일했지만 2악장 ‘프레스토’는 시작에 불과했다.
3번 1악장은 드라마틱한 1주제와 대위법적인 2주제의 정중동(靜中動)을 자신만의 음악어법으로 그렸다. 3악장 안단테에서 처연하게 흐르는 ‘별의 노래’에서 회색빛 러시아 하늘색을 덧입혔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분출해야 하는 프로그램 때문에 임윤찬은 연신 손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마침내 소나타 4번, ‘A#-D#-G#-C#’ 이렇게 4도로 층층이 쌓아 올린 기본 주제는 2악장까지 순환하며 하나로 통합되었다. 피날레 ‘Prestissimo volante’는 악장 지시어 그대로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임윤찬은 다이내믹의 극한까지 몰아붙였고 이는 ‘수’의 정점이자 대서사시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소나타 2번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고백했던 임윤찬이 4년의 담금질을 거쳐 세상에 내놓은 스크랴빈은 이토록 완성도가 높았다.
임윤찬 팬덤으로 뜨거웠던 산토리홀
산토리홀은 이날 우리나라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면 한국 청중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콘서트 40분 전, 산토리홀 입구에 길게 늘어선 청중은 홀의 웅장한 파이프오르간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오르골의 팡파르를 보면서 벌써 축제 분위기를 실감했다.긴 머리카락이 연주에 방해가 돼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로 바꾼 임윤찬이 무대로 나올 때부터 열광의 도가니였다. ‘팬덤’은 굳건해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임윤찬 팬카페’ 회원은 2년 동안 무려 5000회의 댓글을 달고 나서야 공연 이틀 전에 좋은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임윤찬식 스크랴빈’의 끝은 청중의 기립박수로 마무리되었다. 언젠가 비가 흩날리는 가을,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블롭스크 공원의 자작나무 숲길을 홀로 걸으며, 러시아를 폐부 깊숙이 호흡하고 나면, 과연 어떤 모양의 스크랴빈을 들려줄까?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클라라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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