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단종·세종 태실지 있는 사천

임명진 2026. 4. 16. 20:2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천 곤명면 태실지… 훼손·논란 속 재조명 시급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 1600만 명을 돌파하며 조선의 제6대 왕, 단종(1441~1457)의 비극적 서사가 전국을 울리고 있다.

스크린 속 슬픔은 관객들을 그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로 불러모으고 있지만, 단종의 흔적은 비단 그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천시 곤명면의 고요한 산자락에도 단종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는 단종의 탄생을 상징하는 태실지가 할아버지 세종대왕(1397~1450)의 태실과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다.

죽어서는 멀리 떨어져야 했던 할아버지와 손자이건만, 이곳에서만큼은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듯하다. 단종은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글을 배우며 그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먹고 자랐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보호막은 세종의 승하와 함께 사라졌다. 큰 품을 잃은 어린 단종은 유배와 죽음으로 점철된 비극의 길을 홀로 걸어야 했다.

태실지 앞에 서면 살아생전 마음 편히 쉴 곳 없었던 단종의 고단한 생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권력의 냉혹한 파도에 휩쓸려 짧게 스러져간 그였기에, 태실을 감싼 적막은 유독 깊고 애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명 탄생을 상징하는 태실지조차 순탄치 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과 친일 인사의 묘, 그리고 태실 주인을 둘러싼 학술적 논란이 겹겹이 쌓여 고요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단종 태실지 안내판


◇왕의 탄생을 기리는 땅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 줄기가 남해를 향해 뻗은 이곳에는 '큰태봉산'과 '작은태봉산'이라 불리는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다. 이 소박한 이름의 봉우리들이 바로 세종대왕과 단종, 두 왕의 태실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태실(胎室)'은 왕실의 탯줄과 태반을 봉안하던 곳이다. 아기태실로 시작해 훗날 왕위에 오르면 석물을 두르고 태실비를 세우는 '가봉(加封)' 절차를 거쳐 왕의 태실이라는 격식을 갖춘다. 그중 단종의 태실은 그의 비극적인 생애 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을 걸어왔다.

단종은 조선 왕조에서 가장 완벽한 적통을 지닌 왕이었다. 세종의 장남 문종(1414~1452)의 외아들로 후궁이 아닌 정실(세자빈) 소생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원손·세손·세자 단계를 모두 거쳐 정식으로 즉위한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완벽한 혈통도 안온한 삶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어머니 현덕왕후(1418~1441)는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났고, 든든한 울타리였던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마저 잇따라 승하하며 열두 살의 단종은 홀로 왕좌에 남겨졌다.

이후 숙부 수양대군(세조, 1417~1468))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비극은 사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세조는 1458년 단종 태실의 철거를 명했다. 왕위 찬탈의 흔적을 지우듯, 조카의 탄생을 증명하던 기록조차 허물어뜨린 것이다.

사후 240여 년간 '노산군'이라 불리며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렀던 어린 왕은, 숙종(1661~1720) 24년(169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왕의 지위를 회복했다.

이는 왕실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충절의 가치를 드높이려 했던 숙종의 결단이었다. 이러한 단종 선양 사업은 영조(1694~1776)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영조는 전국에 흩어진 단종의 흔적을 전수 조사하도록 명했고, 그 과정에서 사천 소곡산(일명 태봉산)에 묻혀있던 단종의 태실이 세상 밖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영조 10년(1734년)에는 지금의 자리에 단종 태실임을 알리는 표석이 새로 세워지며 비로소 국가 기록으로 공식화됐다. 이 모든 과정은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존하는 태실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 의궤는 두 태실지가 단순한 유적을 넘어 국가가 공인한 역사의 성지임을 증명한다. 현재 두 태실지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남도 기념물 제30호(세종)와 제31호(단종)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 산의 정산 부근에 조성돼 있었지만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거쳐 파괴돼 지금은 그 석물을 한데 모아 현 부지에 조성했다. 원래 있는 부지에는 민간인 모역이 조성돼 있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 안내판


◇진위를 둘러싼 논란

영조 대에 이르러 국가 기록으로 공인된 단종 태실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조선총독부는 1928년부터 전국에 흩어진 태항아리를 경기도 양주 서삼릉으로 강제 이송했다. 이 과정에서 사천 태실지의 태지석(胎誌石·기록 돌)이 확인됐는데, 그곳엔 단종이 아닌 세조의 손자이자 예종의 장남인 '왕손 이분(인성대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각에서는 "영조 대에 위치를 잘못 파악해 확정한 뒤 그대로 관리해온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세조에 의해 철저히 지워졌던 단종의 기록 탓에 복원 과정에서 혼동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논리다.

사천시는 이를 반박하고 있다. 1928년 봉출(이송을 위해 꺼냄) 당시 현장 기록에는 단종의 태실임이 명시돼 있으며, 인성대군의 태지석이 발견된 것은 이송 과정에서의 실수나 의도적 바꿔치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현장에 남은 '팔각형 중동석'이다. 사천시 관계자는 "이 양식은 왕의 태실에만 적용되는 격식인데, 요절한 왕손(인성대군)의 태실에 이런 가봉을 했을 리 없다"며 "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경남도 문화유산위원회 역시 기념물 해제 사유가 없다고 결론 내린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단종 태실지에 친일인사 최연국의 묘가 조성돼 있다.


◇세종과 단종의 흔적, 되살려야

논란은 학술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태실지 자체가 불편한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크게 훼손된 두 태실지는 일제강점기에 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조선 왕실이 관리하던 성지가 일제에 의해 친일 인사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현재 단종 태실지 입구에는 '경남도 기념물 제31호'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러나 정작 성역이어야 할 그 내부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최연국(1886~1951)의 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주인은 쫓겨났고, 그 빈자리는 일제에 협력한 이의 묘소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한때 단종 태실을 굳건히 지키던 석물과 비석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채 주변에 덩그러니 방치돼 있다.

살아서는 권력의 칼날에 쫓기고, 죽어서는 탄생의 흔적인 태실지마저 수난을 겪고 있는 단종. 생의 시작과 끝 그 어디에도 온전한 안식처가 없다는 사실이 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시리고 씁쓸하게 다가온다.
 
세종대왕 태실지가 있는 야산.
단종 태실지가 있는 야산.


경남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세종대왕 태실지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원래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산 정상에는 민간 묘역이 조성돼 있고, 산 아래 현 부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 석물과 비석을 모아 정비해 놓은 상태다.

사천시는 태실지의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해 수년 전부터 단종 태실지 부지 매입을 추진하며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매입이 완료된다면 발굴 조사를 통해 태실의 정확한 위치와 구조를 규명한 뒤 복원 방향을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차후 국가 사적 지정을 위한 경남도 신청과 종합 정비 계획 수립도 함께 추진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 사이 강원 영월, 경북 성주 등 단종 관련 유적을 보유한 지자체들은 영화 흥행에 발맞춰 발 빠르게 관광 명소화에 나서고 있다. 사천 곤명면의 태실지는 훼손과 방치라는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그 역사적 가치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 한 편이 비운의 왕을 다시 불러낸 지금,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흔적을 온전히 되살리는 실질적인 노력이 시급하다. 그 시작은 현장을 찾아 기억하는 '관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임명진기자·취재 도움=사천시
 
세종대왕 태실지, 산의 정산 부근에 조성돼 있었지만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거쳐 파괴돼 지금은 그 석물을 한데 모아 현 부지에 조성했다. 원래 있는 부지에는 민간인 모역이 조성돼 있다.
단종 태실지 입구
단종 태실지에 석물이 쓰러져 있다.
단종 태실지에 친일인사 최연국의 묘가 조성돼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 산의 정산 부근에 조성돼 있었지만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거쳐 파괴돼 지금은 그 석물을 한데 모아 현 부지에 조성했다. 원래 있는 부지에는 민간인 모역이 조성돼 있다.
 

Copyright © 경남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