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100년 전 봄날 덕수궁을 걷는다면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정동길로 나섰다. 대한문 앞. 1000원 입장권을 끊고, 덕수궁으로 들어선다. 햇살이 따사롭다. 2주 전 만개했던 벚꽃은 흔적이 없지만, 진달래, 철쭉과 개나리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한없이 평화로운 2026년 4월 중순의 풍경이다. 궁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산 뒤 석조전으로 향한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구수한 향이 꽤 괜찮다. 봄에 취해서인가, 배롱나무 아래서 괜한 잡상 하나가 떠오른다. 고종도 커피를 좋아했다지. 100여년 전 커피를 궁내에서 음미하던 고종의 기분이 이랬을까.
경향신문에서 정동길을 가로질러 덕수궁으로 가는 10분은 기억의 길이다. 아관파천의 현장이었던 구 러시아공사관, 유관순 열사가 수학했던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그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중명전을 지난다.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는 손탁호텔 터를 알리는 표지판도 이 길에 있다.
석조전을 지나 돈덕전으로 향한다. 고종이 즉위 40주년 기념행사장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몇해 전 복원됐다. 고종이 돈덕전을 지을 때, 이 건물이 100여년 뒤 한낱 직장인이 커피를 들고 방문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우디 앨런 감독이 연출한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영화가 있다. 파리의 밤거리를 걷던 주인공이 우연히 1920년대 파리로 가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등 당대의 예술가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그 영화처럼 100년 전 덕수궁으로 돌아간 나를 상상해본다.
때는 1926년 4월이다. 3·1운동이 있은 지 7년, 청산리 전투가 있은 지 6년 뒤다. 왁자지껄한 일본어와 딸각딸각 걷는 게다 소리가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덕수궁 돌담을 넘어온다. 각국 외교관과 서슬 퍼른 일본 순사들이 정동길을 분주히 오간다.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억누르며 입을 꾹 닫은 조선 청년들도 한편을 걷고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잠시 허용했던 문화통치 시대.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통해 일제강점기 서민들에게 닥친 빈곤과 지식인의 좌절과 우울을 기록할 때다.
그 시절 식민지 조선 청년에게 2026년의 대한민국 소식을 들려준다면 어떨까.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넘어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며칠 전 광화문에서 BTS의 공연이 열렸고 그 공연이 실시간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90여개국에 방송됐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탔고, 봉준호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비빔밥과 김밥, 김치 등 K푸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거둔 성과를 얘기해준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말하기 꺼려지는 것도 있다. 6·25전쟁과 분단이다. 100년 전 경성에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함경도·평안도 등 8도의 말이 뒤섞였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경성을 거쳐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와 손기정은 바로 그 기차를 타고 중국 하얼빈과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통일신라 이후 1000년 넘게 한반도는 한 몸으로 살았다. 그들에게 남북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서울과 평양을 오갈 수 없게 된 게 70년이 넘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덕수궁 돌담길이 남긴 중요한 기억은 ‘국제관계의 냉혹함’이다. 힘이 없던 구한말. 청과 일본, 러시아와 미국 등 열강 사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 끝내 패망했던 대한제국의 아픔이 그 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우방은 없었다.
4월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서울의 이야기다. 같은 시간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드론과 마사일이 날고 매캐한 연기가 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을 터이다. 우크라이나가 그렇고, 이란이 그렇고, 레바논이 그렇다.
며칠 전에도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쏜 북한, 대만과 긴장 관계가 여전한 중국,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도 결코 녹록하지 않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환율과 금리, 주식이 출렁이는 이 혼란의 시대를 별 탈 없이 잘 넘길 수 있기를. 시시각각 전해지는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 뉴스를 들으며 덕수궁을 나섰다.

박병률 탐사기획에디터 겸 경제에디터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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