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들] 형사합의와 공탁, 길을 잃은 ‘진정한 사과’

김경현 2026. 4. 1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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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강력 범죄와 성범죄 등 뉴스 끝에는 어김없이 가해자의 형량을 둘러싼 논란이 뒤따른다. 대중의 법 감정에 턱없이 못 미치는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질 때마다, 판결문에는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을 참작했다'는 문구가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재판부가 형량을 정할 때 피해자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치유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절차다. 하지만 그 '피해 회복'을 증명하는 두 가지 수단, 즉 '형사합의'와 '형사공탁'이 법정에서 발휘하는 효과와 그 이면에 담긴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먼저 '형사합의'는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의 의사가 합치되어야만 성립하는 '쌍방향'의 결과물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범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위로금이나 배상금을 제시하면, 피해자가 이를 수용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돈이 오가는 거래가 아니다. 가해자의 진지한 반성과 피해자의 용서가 수반되며,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회복적 사법'의 가치가 가장 잘 구현되는 지점이다. 법원 역시 이를 매우 강력한 양형 감경 사유로 인정하며, 폭행이나 명예훼손 같은 반의사불벌죄의 경우에는 아예 국가의 처벌권 자체가 소멸하게 되고, 타 범죄의 경우 사실상 원래 처벌되어야 할 형벌보다 한 단계 낮은 처벌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형사공탁'은 가해자의 '일방적'인 행위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를 시도했으나 피해자가 완강히 거부하거나, 연락조차 닿지 않을 때 법원 공탁소에 일정한 금액을 맡겨두는 제도다. 본래 이 제도는 가해자가 나름의 성의를 다했음을 입증할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2022년 12월부터 시행된 '형사공탁 특례제도'는 제도의 활용도를 폭발적으로 높였다. 과거에는 공탁하려면 피해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 인적 사항을 알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정보를 빼내어 합의를 종용하거나 협박하는 2차 가해가 빈번했다. 이를 막고자 피해자의 인적 사항 없이 '사건번호'만으로도 공탁할 수 있게 법을 고친 것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특례제도였지만, 현실은 이와 달리 흘러가고 있다. 형사합의와 형사공탁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인 '피해자의 동의 여부'가 법정에서 종종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탁 역시 합의와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해 금전적 노력을 기울인 객관적 지표로 채택되어 형량 감경의 사유가 된다. 문제는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그저 형량을 줄이기 위한 '감형 티켓'으로 공탁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사법계와 사회 전반에서 맹비난을 받고 있는 '기습 공탁'이 대표적인 병폐다. 가해자가 재판 내내 혐의를 부인하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선고기일이 임박해서야 수백, 수천만 원을 법원에 기습적으로 들이밀어 감형을 받아내는 행태다. 엄벌만을 탄원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피해자는, 자신이 만져보지도 못한 일방적인 공탁금 때문에 가해자의 형량이 깎이는 참담한 상황을 법정에서 목도하게 된다.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돈으로 재판부의 선처를 사는 이른바 '면죄부 쇼핑'은, 법이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심각한 2차 가해나 다름없다.

합의가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의 과정이라면, 꼼수 공탁은 사법 정의를 우롱하는 행위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와 일선 재판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피해자가 수령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힌 공탁은 감경 사유에서 제외하거나 신중히 판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침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원은 기계적으로 공탁금의 액수나 유무만을 저울질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습 공탁이 이루어질 경우 선고를 미뤄서라도 피해자의 의사를 반드시 묻고 확인하는 절차적 보완도 시급하다.

형벌의 목적은 단순히 죄지은 자를 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훼손된 정의를 바로잡고, 억울한 피해자의 일상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데 있다. 세상의 어떤 막대한 돈이라도 '진정한 사과'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법부의 저울이 가해자의 지갑 두께에 따라 기우는 일이 없도록, 제도의 맹점을 철저히 보완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그것이 '법의 지배'가 국민의 상식과 공감대 위에 굳건히 서는 길이다.

김경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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