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경체] 사재기에서 포모까지…내 지갑을 흔드는 심리는?
[EBS 뉴스]
서현아 앵커
'혹시 못 사면 어쩌지'라는 불안에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카트에 담은 경험, 한 번쯤 있으시죠?
오늘은 사재기 현상이 우리 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태성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대표와 짚어보겠습니다.
최근 전쟁 소식에 나프타 수급이 불안해지자 종량제 봉투 사재기에 품절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전쟁 뉴스가 왜 우리 동네 마트의 진열대를 비우게 만드는 건지, 그 심리적인 요인은 무엇일까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전쟁 뉴스가 연일 자극적인 영상과 함께 계속 보도되면, 우리 뇌는 '나프타 부족하여 봉투 생산이 차질이 있다'라는 시나리오를 내일 당장 벌어질 일처럼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종량제 봉투 원가에서 나프타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국내 비축량 같은 객관적 정보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뉴스에서 본 '품절' 장면이 판단의 전부가 되는 거죠.
여기에 '손실 회피(Loss Aversion)' 심리가 더해집니다. 카너먼의 전망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크기의 이득보다 손실을 약 2배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혹시 못 사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안 사도 별일 없겠지'라는 합리적 판단을 압도하게 됩니다.
서현아 앵커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판단하려고 해도 너나할 것 없이 물건을 싣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이런 심리가 사재기를 어떻게 증폭시키나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바로 '군중효과(Herding Effect)' 떄문입니다.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일종의 정보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사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른 말로 '사회적 증거(Social Proof)'라고도 부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보의 폭포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처음 몇 사람이 사재기를 시작하면 그 행동 자체가 신호가 되고, 이를 본 사람들이 따라하면서 연쇄적으로 확산됩니다.
각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같은 불완전한 신호만 따라가고 있는 셈입니다.
코로나 초기 마스크 대란도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이었습니다.
서현아 앵커
최근 주식 열풍과 더불어서 많이 나오는 단어가 '포모(FOMO)' 현상입니다.
'나만 돈 못 벌까 봐' 생기는 두려움이라는 뜻이죠.
사재기 현상과 이 포모 현상, 우리 뇌는 이 두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나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흥미롭게도 우리 뇌는 이 둘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핵심은 둘 다 '손실 프레임'으로 인식된다는 점입니다.
사재기는 '물건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FOMO는 '수익 기회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인데, 행동경제학적으로 보면 둘 다손실 회피가 작동하는 동일한 심리 구조입니다.
다만 작동 속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재기는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시스템 1', 즉 직관적·즉각적 반응으로 일어납니다.
반면 투자 FOMO는 '남들은 벌고 있는데 나만 못 벌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지면서 조금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다.
로버트 쉴러 교수는 투자 시장에서는 주변인의 성공담이 일종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면서 군중효과가 증폭되는 특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태는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현아 앵커
'지금 안 사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생각에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산 경험, 누구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강력한 압박감이 우리 이성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또 다른 사례가 있을까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후회 회피(Regret Aversion)'라는 편향입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할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그 감정을 피하기 위해 지금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백화점에서 '오늘만 세일'이라는 문구를 보면 당장 필요 없는 물건도 사게 됩니다.
'안 사고 나중에 정가 주고 사면 후회하겠지'라는 미래의 감정이 현재의 판단을 지배하는 거죠.
실제 실험에서도 사람들에게 마감 시한을 주면 합리적 판단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시간 압박이 가해지면 '시스템 2', 즉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사고 체계가 작동할 여유가 사라지고, '시스템 1'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서현아 앵커
그런데 봉투값 몇백 원 오르는 건 무서워서 사재기를 하는 분들이, 정작 주식이나 가상화폐로 손실이 나고 있을 때는 '언젠간 오르겠지' 하며 버팁니다.
상황에 따라 돈의 가치를 다르게 매기는 것, 이것도 우리 뇌가 하는 일인 건가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정확합니다.
바로 '심적 회계(Mental Accounting)'라는 개념인데 우리는 객관적으로 같은 금액이라도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계좌에 넣어두고 전혀 다른 기준으로 관리합니다.
종량제 봉투는 '생활비 계좌'에 속하고, 이 계좌에서는 몇백 원의 변동도 민감하게 체감합니다.
반면 주식이나 코인은 '투자 계좌'에 넣어두는데, 이 계좌에서는 손실이 나도 '아직 팔지 않았으니 진짜 손해는 아니야'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심적 회계의 또 다른 특징은 '매몰 비용 효과'와 결합한다는 점입니다.
투자에서 이미 잃은 돈이 크면 클수록 '여기서 빠지면 그동안 잃은 것이 진짜 손해가 된다'며 버티게 됩니다.
서현아 앵커
쇼핑 앱의 '품절 임박' 자막이나 뉴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들이 우리의 공포를 자극합니다.
우리가 이런 마케팅 설계에 얼마나 취약한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매우 취약합니다.
'품절 임박', '재고 2개 남음' 같은 표시는 '희소성 효과(Scarcity Effect)'를 활용한 것으로 사람들은 부족한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원래 넛지는 강제 없이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설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기업과 미디어가 이를 역으로 활용하여 공포와 조급함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쓸 때, 이를 '다크 넛지' 혹은 '슬러지(Sludge)'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런 설계에 취약한 이유는 급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깊은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시스템 1'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서현아 앵커
개개인은 불안해서 사재기를 하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 그 행동이 물가를 올리고 수급을 꼬이게 만듭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런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만드는 사회적 비합리성'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부분이 좋으면 전체도 좋을 수 있다고 우리가 잘못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를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고 합니다.
개인 입장에서 사재기는 합리적입니다.
실제로 품절되면 내가 손해니까요.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면 없던 품절도 만들어지고, 가격까지 올라가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죄수의 딜레마'로도 설명합니다.
모두가 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혹시 남들이 사면 나만 손해'라는 계산이 작동하면서 전원이 사재기를 선택하는 최악의 균형에 도달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상황에서는 정부의 역할과 부드러운 개입이 중요합니다.
서현아 앵커
전쟁, 인플레이션, 주식 폭등 소식이 매일 들려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이런 '공포의 사재기'와 '탐욕의 포모'라는 파도 속에서 자기 지갑과 멘탈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원칙 하나만 꼽아주신다면요?
정태성 대표 / 한국행동경제학연구소
'10분만 기다려 보자'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발견한 인간 편향의 대부분은 '시스템 1'이 즉각적으로 반응할 때 발생합니다.
카너먼이 말한 것처럼 '빠르게 생각하기' 모드에서 우리는 가장 취약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거나 흥분되는 경제 정보를 접했을 때, 10분만 행동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물어보세요.
'이것이 진짜 나에게 필요한가?', '지금 안 하면 정말 큰일 나는가?', '이 정보는 나를 조급하게 만들려고 설계된 건 아닌가?'.
이 세 가지 질문을 거치면 '시스템 2'가 작동하면서 대부분의 충동적 판단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은 결국 나 자신을 아는 학문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는지 알면, 그 흔들림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서현아 앵커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것, 결국 손실 회피라는 자연스러운 심리라는 설명이었는데요.
우리 뇌를 진정시키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10분의 여유,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대표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Copyright © E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